"끊이지 않는 유해물질 누출 사고의 근본 원인은 대기업과 협력업체 간 협력 시스템 미비입니다. 대기업들은 안전관리 시스템을 제대로 구비하고 있음에도 유해물질의 저장ㆍ설비ㆍ장비보수 등 위험한 업무는 협력·도급업체에 떠넘기는 실정입니다. 산재율을 획기적으로 낮춰 안전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첫 걸음은 대기업과 하청업체 간 협력 시스템 구축입니다."
최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를 위해 인천 집무실에서 만난 백헌기(57ㆍ사진)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이사장은 어느 때보다 신경이 곤두선 것처럼 보였다.
지난해 9월 구미 휴브글로벌 불산 누출사건을 시작으로 14일 전남 여수 국가산업단지 대림산업 화학공장 폭발까지 시도 때도 없이 사방팔방에서 화학물질 사고가 터지고 있기 때문이다.
6년간의 한국노총 사무총장을 거쳐 2011년 7월 산업안전보건공단 수장으로 취임한 백 이사장은 노동계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답게 인터뷰 내내 현장을 강조했다.
백 이사장이 책상머리가 아닌 현장에서 느낀 국내 산업안전의 가장 큰 문제는 대기업과 협력업체 간 협력 시스템 부재였다.
백 이사장은 "근로자들에게 최저임금 수준만 간신히 지급하는 하도급 업체들이 안전보건에 투자할 겨를이 있겠냐"며 "같은 체계 아래서 일하는 원청과 하청이라도 원청은 무재해인데 협력사에서만 재해가 반복되는 일이 허다한 이유"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얼마 전 여수 대림산업 화학공장 폭발참사가 빚은 17명의 사상자 중 15명은 사전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않은 협력업체 소속 단기 계약직 근로자였다.
백 이사장은 "유해작업의 도급금지를 위험물질 전반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정부가 검토하고 있는데 이와 함께 원청의 재해율을 산출할 때 협력업체의 재해율도 포함시키는 방안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제도개선보다 중요한 것은 안전투자가 여의치 않은 협력업체의 실정을 인정하고 원청인 대기업이 공생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국내 산업현장의 안전관리에서 누누이 지적되는 또 다른 문제점은 바로 정부 내 컨트롤타워 부재다. 컨트롤타워 얘기가 나오자 백 이사장의 낯빛은 다소 상기되고 목소리 톤은 한층 올라갔다.
국내에 유통되는 화학물질은 이용 목적과 용도에 따라 무려 7개 소관부처 아래 80개의 법률로 흩어져 있다. 그래서 사고가 터질 때마다 고용노동부와 환경부ㆍ경찰ㆍ소방방재청 등이 제각각 우왕좌왕하며 수습이 지연되는 촌극이 빚어진다.
백 이사장은 "사업장에서 화학물질 사고발생 직후 안전보건 전문기관인 공단이 현장에 가면 현장보존을 이유로 막아서는 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직원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다"며 "불산이나 염소 등 유독물질은 초기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전문기관인 공단이 현장에 접근하지 못해 일반인들의 피해가 커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산업안전보건공단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과 협력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백 이사장은 "조만간 국과수ㆍ경찰과 업무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할 예정"이라며 "이를 통해 사업장 재해의 경우 공단이 사고 초기에 경찰과 함께 현장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백 이사장은 30년 가까이 노동계의 한복판을 누비며 노사갈등을 중재하고 산업현장의 문제점을 개선해온 습관대로 온몸으로 현장을 누비는 스타일이다. 그는 사업장 사고가 발생하면 누구보다 먼저 현장으로 달려간다. 이 같은 현장체질은 정부 유관부처와 일을 풀어낼 때도 그대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사례가 공단의 인력증원이다. 현재 24개 공단 지역센터에서 관리해야 하는 전국 사업장은 180만개를 넘는다. 1개 지역센터당 7만5,000개이고 공단인력 1인당 1,384개꼴이다. 이 때문에 백 이사장은 취임 이후 인력증원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백 이사장은 "지난해 여름 인력증원을 위해 기획재정부를 찾아가 담당 실무자를 만나기 위해 4시간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기다리고 서 있으니 공무원들의 마음도 비로소 움직이더라"며 "이를 통해 공단에 온 지 1년6개월 만에 처음으로 올해 55명의 인력을 겨우 충원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24개 지역센터로는 수많은 사업장을 다 커버할 수 없다"며 "산재가 발생하면 근로자의 귀중한 생명손실을 초래해 기업이나 국가에 손해를 끼치는 만큼 공단 인력증원은 소중한 인명을 지키기 위한 투자라는 개념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국내 기업들의 안전불감증과 정부 컨트롤타워 부재는 최근 산업재해율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근로자 1만명당 사고로 사망하는 사람 수를 뜻하는 사고성 사망만인율의 경우 한국은 2011년 기준으로 0.96명을 기록하고 있다.
2007년 1.10명, 2008년 1.07명, 2009년 1.01명, 2010년 0.97명 등으로 완만한 감소세를 보이고 있지만 독일(0.16)이나 일본(0.20), 미국(0.35) 등 다른 선진국과 비교하면 여전히 높은 상황이다.
전체 근로자 수 가운데 사고를 당한 재해자 비율을 나타내는 사고재해율 역시 최근 5년간 0.60~0.64% 수준을 맴돌고 있다.
공단의 올해 목표는 사망만인률과 재해율을 모두 5% 이상 줄이는 것이다. 목표달성을 위한 공단의 핵심 정책은 '위험성 평가제도'와 '서비스업 재해예방'이다.
3년간의 시범사업을 거쳐 올해 1월부터 본격 시행 중인 위험성 평가제도는 사업주가 사업장의 유해위험 요인을 파악한 뒤 사고발생 요인 감소대책을 직접 수립, 실행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업종·규모와 상관 없이 모든 사업장이 매년 의무적으로 시행해야 하며 사업주와 실무자는 공단 지역센터를 찾아 관련 교육을 받아야 한다.
우리나라보다보다 재해율이 매우 낮은 해외 선진국들은 일찌감치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영국은 산재사고 발생시 위험성 평가실시 여부에 따라 처벌수위가 결정되는 제도를 1992년 도입했다. 일본과 싱가포르는 2006년부터 위험성 평가실시를 의무화했다.
백 이사장은 "소규모 사업장의 경우 자율적인 안전관리가 쉽지 않다는 현실을 감안해 2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서는 위험성 평가에 대한 컨설팅을 지원하고 있다"며 "우수 사업장으로 선정되면 3년간 정부감독 유예 외에 산재보험료를 15% 감면해줄 수 있도록 법 개정작업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재해율 감소를 위해 공단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또 하나의 분야는 서비스업 재해예방이다. 서비스업의 경우 지난 10년간 사업장 수가 두 배 가까이 늘어나면서 재해자 수 역시 같은 기간 60%나 폭증했다.
백 이사장은 "업종이 다양한데다 휴폐업도 잦은 서비스업의 특징 때문에 체계적인 안전관리 지원이 쉽지 않다"면서도 "재해발생률이 높은 7대 업종을 주요 타깃으로 선정해 집중적인 예방활동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단은 ▦건물관리업 ▦위생업 ▦사회복지사업 ▦교육서비스업 ▦도소매업 ▦음식·숙박업 ▦사업서비스업(경호업·인력공급업 등)을 7대 위험업종으로 선정하고 이를 다시 고위험군과 중위험군ㆍ저위험군 등으로 구분해 차별화된 대책을 시행하고 있다.
고위험군 사업장은 공단에서 직접 기술·교육 지원을 담당하고 상대적으로 위험요소가 덜한 곳은 민간에 예방사업을 위탁하는 식이다.
백 이사장은 최근 잇단 사고로 인명피해가 늘어나는 점에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하지만 이를 또 다른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최근 산업안전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지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백 이사장은 "예전에는 대다수 국민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무슨 공장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최근에는 조금만 냄새가 나거나 연기가 보여도 곧바로 신고를 한다"며 "선진국들처럼 우리나라도 위험물질과 관련한 주민들의 알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 이사장은 취임 6개월 후인 지난해 초 공단 경영방침을 '창의현장 중심'으로 바꿨다. 새 정부의 핵심 가치인 창조와 창의를 공단이 앞서 실천하고 있었던 셈이다. 백 이사장은 "현장에 나가보면 예전에는 보고서를 50쪽씩 만들어 올리더라"며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닌 내용이고 관습이 아닌 창의적인 사고라는 생각에 지금은 딱 석 장짜리 보고서만 받고 있다"고 전했다.
1시간 넘게 이어진 긴 인터뷰를 하다 보면 대화가 잠시 샛길로 빠지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백 이사장과의 대화는 단 한순간도 옆길로 새지 않았다. 인터뷰 내내 백 이사장의 화두는 단 하나 '산업안전'이었다.
"대한민국은 '빨리빨리 문화'로 성장해온 나라입니다. 그 덕분에 해외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10대 강국으로까지 성장했지요. 하지만 안전보건만큼은 '조심조심 문화'를 정착시켜야 합니다. 요즘 술자리에 갈 때마다 공단의 슬로건이기도 한 '조심조심 코리아'를 건배사로 외치는 이유입니다. 1,600만 근로자의 안전확보를 공단이 책임지고 온 국민이 함께 예방문화 정착을 위해 노력한다면 산업안전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는 날도 그만큼 빨리 올 것입니다."
산업안전 모바일 앱 전도사 서민준기자 morandol@sed.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