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4월16일] 라팔로 조약


1922년 4월16일, 북부 이탈리아 제노바. 세계경제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단이 충격에 빠졌다. 독일과 소련이 쌍무조약을 맺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전쟁배상금과 채무의 상쇄, 국교 재개, 최혜국 대우가 골자인 조약에 영국과 프랑스는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그럴 만했다. 유럽의 경제질서를 주도하려고 미국의 참가까지 배제한 채 개최한 회의에서 주객이 전도됐으니까. 독일이 회담장 밖 라팔로 마을에서 소련과 만난 이유는 고립 탈출. 가혹한 배상금과 국제연맹 가입도 불허하는 불공평한 전후 처리, 고율관세에 따른 수출봉쇄에서 벗어나려고 소련과 손을 잡았다. 소련도 독일이 필요했다. 내전을 종식하고 신경제정책(NEP)을 표방한 지 1년. 경제를 살리기 위해 독일의 과학기술이 탐났다. 라팔로 조약은 피를 불렀다. 독일의 대기업 아에게(AEG)전기회사 회장 출신으로 외무부 장관이던 발터 라테나우가 조약 체결 두달 뒤 암살 당했다. 프랑스는 이듬해 1월 독일의 루르 산업지대를 강제 점령했다. 독일이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빠져든 것도 루르 강점 이후부터다. 단기적 고통 뒤에 독일은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고립에서 벗어나 국제적 지위가 격상되기 시작했다. 소련 영토 내에서 독일군을 비밀리에 훈련시키고 무기공장도 지었다. 소련도 마찬가지. 독일의 기술로 유전이 개발되고 군대 장비도 개선됐다. 반면 영국과 프랑스의 석유자본은 큰 손해를 입었다. 소련 공산정권이 무너질 것이라며 거금을 주고 사들인 러시아 유전의 개발권이 공중으로 날아갔기 때문이다. 라팔로 조약에 대한 평가는 제 각각이다. 연합국 측은 2차대전의 씨앗이며 줄타기식 외교로 갈등과 의심만 부풀렸다고 해석한다. 독일에서는 조국을 위기에서 구한 자주외교의 상징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무엇이 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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