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반지의 제왕’으로 ‘스크린 제왕’ 우뚝

첫장편 `고무인간의…`로 주목…거장 탄생예고조국 뉴질랜드 경제에 기여 `국민적 영웅`으로 `뉴질랜드 최고의 스타이자 가장 중요한 수출 상품.` 뉴질랜드 사람들은 제76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반지의 제왕_왕의 귀환`으로 역대 최다 타이기록인 11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쥔 피터 잭슨 감독을 이렇게 부른다. 7년 동안 매달린 `반지의 제왕` 시리즈로 그는 세계적인 흥행 감독으로 떠오른 것은 물론이고 2002년 모국인 뉴질랜드에서 `나라를 빛낸 역대 인물`로 선정돼 명예훈장까지 받은 인물이 됐다. 그가 조국을 찾을 때면 뉴질랜드 헬렌 클락 총리가 공항까지 직접 마중을 나올 정도. 그만큼 뉴질랜드인의 자부심과 국가경제에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반지의 제왕`은 2만명 이상 고용을 창출했고, 뉴질랜드 영화산업을 2, 3배 가량 늘렸다. 촬영지는 관광객들로 붐벼 `반지의 제왕`의 첫 시리즈가 선을 보인 2001년 이후 관광수입만 400만명(뉴질랜드 전체 관광객의 10%)에 38억 달러를 기록, 뉴질랜드의 주력 상품인 농산물 수출액에 육박하고 있다. 특수효과를 맡은 WETA는 미국 루카스필름의 ILM사와 어깨를 겨룰 만큼 성장했다. 이런 공로를 감안하면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 1일 뉴질랜드 총리와 국민들이 수도 웰링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앞에서 잭슨 감독의 수상 때마다 환호한 것도 지나친 게 아니다. “무엇보다 전세계에 호빗족을 알린 것 같아 기쁘다. 즐겁게 작업해준 뉴질랜드의 모든 훌륭한 스태프에게 무한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는 잭슨의 수상소감은 그것에 대한 화답인 셈이다. 170㎝ 단신에 뚱뚱한 체격인 잭슨은 1961년 웰링턴 부근 푸커루아 베이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샌드파이퍼`라는 영화에 아역으로 출연했던 그는 여덟 살 때 부모가 사준 8㎜ 비디오 카메라를 만지며 영화의 꿈을 키웠다. 그리고 열 두 살 때 이미 집에서 친구들을 동원해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만든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학교도 그에게는 필요 없었다. 열 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웰링턴의 신문사에서 사진 조판부 견습공으로 일하던 그는 87년 스물 두 살에 16㎜ 카메라로, 친구와 가족을 동원하고, 부엌에서 만든 모형으로 최초의 장편영화인 `고무인간의 최후`를 만들었다. 직접 감독, 제작을 맡고 각본까지 쓴 이 작품이 칸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아 30개국에 팔리면서 그의 영화인생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이때 시나리오 작가 프란 월시를 만나 결혼을 했다. 월시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잭슨과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해 이번에 각색상을 공동 수상하는 등 인생 뿐 아니라, 영화작업에서도 좋은 반려자가 됐다. 잭슨이 반지의 제왕을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한 것은 열 여덟 살 때. 기차여행을 하면서 톨킨의 원작소설을 처음 읽은 것이 계기가 됐다. 95년 미라맥스(미국)사와 영화 제작을 처음 협의했으나 1편으로 줄이라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어 미국 뉴라인시네마(미국)사와 손을 잡았다. 그는 작업 중이던 `킹콩`에서 손을 떼고 7년 동안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 몰두했고, 이 시리즈의 성공으로 `시민 케인` `대부`와 함께 `세계영화사를 바꾼 10대 작품`을 만든 감독, 편당 240억원을 받는 감독이 됐다. <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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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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