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전9시 여의도 KBS 본관. 지난 24일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정식 임명된 정연주 KBS 사장은 주차장의 출구를 통해 기습적으로 출근에 성공했다. 정 사장의 출근을 저지하기 위해 모여있던 20여명의 노조원들은 순간 허를 찔렸다. 한 노조원은 입구를 놔두고 출구로 들어오는 비양심적인 사람이 대체 어디 있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정 사장의 출근길은 험난했던 그의 지난 임기를 생각나게 한다. 정 사장은 2003년 처음 KBS 사장에 취임했을 때부터 낙하산 인사라는 논란에 휩싸였다. 이후 탄핵방송 공정성 시비, 좌파 드라마 방송, 경영 성과 논란 등에 시달렸다. 이번에도 낙하산 인사, 노 정권의 차기 대선용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문제는 정 사장의 공영방송에 대한 비전과 철학의 진정성이다. 그는 이날 사내 방송을 통해 취임사를 발표하면서 공영방송인 KBS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했다. 정 사장은 공영방송으로서의 KBS 위상 확립을 위해 25년간 동결돼온 수신료 인상, 재허가 추천기간 연장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청료를 높이고 재허가 추천기간을 늘리면 자동적으로 KBS의 공영성이 확보된다는 말인가. 공영방송으로서의 위상은 돈과 제도적 지원만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정 사장을 비롯한 KBS 구성원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한나라당과 일부 언론이 정연주호(號)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번에 정 사장이 역점 사업으로 내놓은 것은 객관적인 보도와 공정한 프로그램 제작 노력, 창의적ㆍ효율적인 조직으로의 개편, 지역국 활성화 등이었다. 앞으로의 임기 운영의 커다란 밑그림을 보여주는 취임사라 할지라도 대부분 새로울 것 없는 뻔한 내용들이었다.
정 사장이 ‘정권의 나팔수’냐, 다매체 시대 공영방송을 이끌어갈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느냐 하는 논란은 공영방송으로서의 KBS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확보하느냐 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두번째 임기를 시작한 정 사장이 취임사에서 밝힌 것처럼 그가 모든 권력으로부터 KBS를 지켜낼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