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글이 갈수록 오염되고 훼손되고 있다. 위험수위를 넘어 보고 듣기 괴로울 정도로 병들었다. 우리말과 글에는 민족 고유의 정서와 자존심이 배어 있다. 우리말과 글을 천대하는 것은 결국 민족정기와 주체성을 좀먹고 병들게 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거리에 나서보면 건물마다 우리말보다는 외래어 간판으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이는 업종을 가릴 것 없이 공통적이다. 이렇게 외래어 간판을 내걸어야만 손님을 더 많이 끌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주거문화의 변화에 따라 도시건 시골이건 아파트가 많이 생겼다. 그런데 이 아파트들도 뜻을 알기 어려운 외래어 이름을 달고 있다. 새로 지은, 또는 새로 짓는 아파트도 다름없다. 영어나 다른 외국어로 아파트 이름을 붙여야 매력이 있고 분양이 잘 된다고 생각하는가.
이래서야 어디 조상의 혼령들이 제삿밥이라도 얻어먹으러 찾아올 수 있겠는가. 아니, 조상의 혼령은커녕 살아 있는 노인들도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 자식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시골에 사는 노인들이 어쩌다가 자식들을 찾아 상경이라도 하면 아파트 이름을 몰라 헤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말과 글을 외면하고 천대하고 훼손하는 것은 간판이나 아파트 이름뿐이 아니다. 일부 젊은 가수를 비롯한 연예인들이 외국어 이름으로 행세하는 경우가 많다. 연기나 노래는 실력으로 보여줘야지 요상한 외국식 이름을 내걸고 행세한다고 해서 제대로 평가 받고 대접 받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 자존심도 없고 주체성도 없는가.
우리말과 글이 이처럼 천대 받고 오염되고 훼손당하고 골병이 깊이 든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일일이 예를 들기 어려운 형편이다.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외래어와 국적 불명의 신조어에 짓밟혀 우리말은 갈수록 순수성과 정체성을 잃고 있다. 광복된 지 벌써 64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일본말 찌꺼기를 털어버리지 못했고 문맥이 통하지 않거나 문법에 맞지 않는 말과 글을 쓰는 사람이 많다.
특히 국민의 바른말과 글 쓰기에 모범이 돼야 할 방송부터 걸핏하면 국어를 훼손하고 언어 소통에 장애를 일으키니 딱한 노릇이다. 일부 오락 프로를 보면 일반인들은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지 못할 줄임말과 비속어가 난무하고 있다. 얼짱ㆍ엄친아ㆍ열공ㆍ듣보잡 같은 괴상한 유행어가 설치고 해안가(해변가)ㆍ모래사장ㆍ관중들(군중들)ㆍ제작진들ㆍ우리들 하는 따위의 겹말이 연발된다. 박수 치다, 빈 공간, 푸른 창공, 늙으신 노부모, 아름다운 미인, 넓은 광장, 남은 여생, 수확을 거두다, 결실(결연)을 맺다, 소외감(배신감)을 느낀다, 관점(시각)에서 본다 하는 것도 모두 겹말이다.
또 치루다는 치르다의 잘못이고 ‘발자국 소리가 난다’느니, ‘이름 모를 절망감’이니, ‘굉장한 미인’이니 하는 소리도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이다. 모듬요리는 모둠요리, 찌게는 찌개를 잘못 쓴 말이다.
사극을 봐도 그렇다. 고려 중기에 원나라에서 들어온 ‘마마’라는 호칭이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초기를 배경으로 한 사극 대사에도 나오고 일본식 용어인 기라성ㆍ민초ㆍ중차대ㆍ일가견 같은 말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뿐만 아니다. 이조(李朝)는 조선왕조, 현해탄은 대한해협 등으로 고쳐 쓰는 것이 옳다.
우리말과 글을 제대로 쓰는 것은 곧 국격(國格)을 지키는 것이다. 또한 말과 글에는 올곧은 정신을 담아야 한다. 말과 글은 곧 인격의 잣대도 되기 때문이다. 키 작은 남자가 ‘루저(Loser)’가 아니다. 우리말을 천대하고 훼손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는 짓이야 말로 인품과 인격의 패배자를 자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