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경상북도 구미에서 불산 누출사고가 발생해 5명이 숨지고 인근 주민 2,000여명이 병원 진료를 받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농작물과 가축 피해 등 지역주민들의 보상금으로 확정된 금액만도 무려 364억원. 불산액을 옮기는 작업자의 부주의가 빚어낸 실수의 결과는 참담했다.
구미 불산 누출사고는 다시 한번 안전관리의 중요성을 깨우치는 계기가 됐지만 그때뿐이었다. 사고 이후 넉달 만인 올 1월 삼성전자 화성공장에서도 다시 불산 누출사고가 일어났고 3월에는 구미케미칼과 대림산업 여수공장에서, 5월에는 현대제철 당진제철소에서 비슷한 사고가 이어졌다. 한 사업장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안전 시스템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셈이다.
어린이보호구역 내 교통사고 역시 우리나라의 수준 낮은 안전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지난 4월 서울의 한 어린이집 앞 도로에서는 다섯 살짜리 어린이가 승합차에 치여 숨졌다. 어린이집에서 나와 도로를 향해 달려나간 이 아이를 승합차 운전자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 사고지역은 어린이보호구역으로 지정돼 과속방지턱이나 안전대 등이 갖춰져 있었지만 운전자의 순간 방심은 모든 것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어린이보호구역 내 교통사고는 2009년 535건에서 2010년 733건, 2011년 751건으로 매년 증가세를 보이다 지난해 507건으로 크게 줄었지만 여전히 많은 어린이들은 보호구역 안에서 제대로 보호 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붉게 바닥칠이 된 어린이보호구역 위를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다.
화학물질 누출사고와 보호구역 내 어린이 교통사고. 둘 사이에 연결고리가 없어보이지만 모두 안전수칙만 잘 지켰더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인재(人災)라는 공통점이 있다. 아울러 개인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 없는,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안전불감증과 이를 미리 걸러내지 못한 부실한 안전체계가 빚어낸 비극이라는 점도 마찬가지다.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무역액 세계 8위 등 우리나라의 주요 경제지표는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음을 알려주고 있지만 국민의식이나 삶의 질은 여전히 국제적인 수준보다 뒤처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안전 문제는 더욱 그렇다.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011년 한해 동안 교통사고와 화재ㆍ붕괴 등 각종 재난ㆍ안전사고에 따른 사망자와 부상자가 36만명을 넘고 3,924억원이 넘는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전체 사망사고 중 안전사고 사망자 비율은 12%를 넘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인 6%보다 2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출범한 박근혜 정부는 이 같은 안전관리의 심각성을 깨닫고 담당 부처 이름까지 행정안전부에서 안전행정부로 바꾸며 적극적인 개선작업을 벌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대한민국의 안전 수준을 한 단계 높이기 위해서는 먼저 탄탄한 안전관리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곳곳에 흩어진 안전 관련 자료를 모아 정리하는 것을 비롯해 안행부ㆍ경찰청ㆍ보건복지부 등 정부 부처별로 분산된 안전관리를 조정할 수 있는 통합기구를 마련하는 작업 등이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할 일로 꼽힌다. 국민들의 안전의식을 높이기 위한 체계적인 교육도 여기에 포함된다.
안전 관련 정보 수집체계 마련은 신뢰성 있는 중장기 안전관리대책 개발을 위해 반드시 선행돼야 할 작업이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재난안전연구원이 지난해 말 발표한 '생활밀착형 안전관리 기술개발 기획연구'에 따르면 안전사고 발생 현황에 대해 부처별로 발표내용이 다르거나 최근 1~2년의 정보만 구축돼 기본 인프라가 매우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통계청과 경찰청ㆍ소방방재청 등 기관별로 가지고 있는 안전정보를 효율적으로 통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다른 부처들과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는 통합 안전사고정보ㆍ사고통계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각 부처별로 나뉘어 있는 안전관리체계를 통합하는 것도 과제다. 안행부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0개 부처가 116개 법령, 1만9,000여건의 안전 관련 규정을 운영하고 있다. 이에 따라 안전기준마다 중복되거나 다른 잣대를 들이대면서 사각지대가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화학물질 벤젠은 유해화학물질관리법ㆍ위험물안전관리법ㆍ산업안전보건법 등이 각각 관리하고 있으며 저장시설 두께 기준도 각 법마다 다르게 규정하는 등 안전관리가 허술하게 이뤄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김현주 국립재난안전연구원 기반보호연구팀장은 "우리나라는 부처별로 각각 안전관리 기준을 가지고 있다 보니 이를 실행하는 지방자치단체가 일일이 뒤따라가기 버겁다"며 "일관성 있는 정책체계를 만들어 부처별로 시스템을 통합해 안정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국민들이 안전에 대해 소홀하게 생각하는 의식을 바꾸기 위한 제도 손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다. 이수경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공장의 안전관리직은 비전문가들이 맡고 있는 경우가 많고 주요 부서에서 밀려난 한직이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며 "임원이 되기 위해서는 안전담당부서장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식의 인사 시스템 도입도 검토해볼 만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안전의식을 확산시키기 위해 교육을 늘려야 한다는 점은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이다.
화재대피나 지진ㆍ태풍 등 자연재해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을 체험식으로 배울 수 있는 소방안전체험관은 우리나라에 고작 4곳뿐이다. 지난해 교육인원은 44만5,471명으로 2010년 33만8,008명, 2011년 41만5,714명에 이어 매년 늘고 있지만 전체 국민 수를 고려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정부는 올해 안에 소방안전체험관을 2곳 더 늘린 6곳으로 확대할 계획이지만 학계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체험관 건립과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개발, 적극적인 홍보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안행부는 지난달 말 ▦통합적 안전관리체계 구축 ▦안전 강화를 위한 선진제도 도입 ▦안전 인프라 및 투자 확충 ▦안전문화 확산 및 안전교육 활성화 등 4대 전략을 통해 안전사회를 만들겠다며 국민안전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안행부의 한 관계자는 "정부의 안전관리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세부적인 안전대책을 지속적으로 보완해가겠다"며 개선 의지를 내비쳤다.
이덕환 서강대 교수는 "제대로 된 안전감시를 하기에는 관리감독체계가 너무 열악하다"며 "안전에 대한 정부 투자를 크게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