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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차 협력업체로 이어지는 하청업체 쥐어짜기 고질적 병폐
대기업만 때린다고 해결 안돼
대-중기간 영업이익률 차이는 하도급관계 탓 아닌 '통계 착시'
납품단가 조정협의제 정착 등 기존 제도부터 제대로 운영을
정치권이 최근 균형감각과 구조적 인식 없이 '못된 대기업, 약한 중소기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휩쓸리고 있다. 새누리당ㆍ민주통합당 등 여야 할 것 없이 하도급 부당 단가 인하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대기업의 중소기업 적합업종 진출시 형사처벌 등 각종 중소기업 보호정책을 쏟아내고 있는 게 대표적 사례다.
흑백논리에서 출발한 중소기업 정책은 실제 중소기업이 처한 현실을 왜곡, 과장할 뿐만 아니라 총선ㆍ대선 등 선거를 앞두고 표를 의식한 포퓰리즘이라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정치권의 표 몰이가 오히려 산업구조적 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해 궁극적으로 중소기업의 경쟁력만 해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납품가 후려치기, 1ㆍ2ㆍ3차 협력업체가 더 문제=원청기업의 하청업체 쥐어짜기는 국내 산업계가 해결해야 할 고질적 병폐다. 하지만 이 문제는 단순히 대기업만 옥죈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지난 15일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하도급거래 실태조사 결과 법 위반 혐의업체 비율은 최상위업체 41.3%, 1차 협력사 46.5%, 2차 협력사 53.2%, 3차 협력사 55.5%를 기록했다. 이번 조사 결과는 하도급 관계를 둘러싼 갈등이 대기업뿐 아니라 1차 이하 협력업체(중소기업) 사이에서도 심각하며 '하도급 사슬'에서 나오는 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1~2개 업체에 거래의 대부분을 의존하는 기업구조는 하도급 문제를 심화시키는 가장 큰 원인이다. 지난해 수급사업자의 83.4%가 상위 협력업체 단 한 곳과 거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매출액의 60% 이상을 1개 업체에 의존하는 비율도 95.2%에 달했다. 글로벌 시장 진출 등 스스로 판로를 개척하는 협력업체들의 노력이 크게 미흡하다는 얘기다.
◇'통계의 착시' 주의해야=중소기업의 낮은 평균 영업이익률 역시 단순한 하도급 관계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2009년 기준 중소 제조업체 중 다른 기업의 주문을 받아 제품을 생산하는 하청업체의 비율은 43.2%로 전체의 절반에 못 미쳤다.
한국경제연구원는 보고서를 통해 대기업-중소기업 간 영업이익률의 차이는 일종의 '통계의 착시' 탓이라고 분석했다. 1995~2009년 중 부실기업의 비중은 21.8%로 이 가운데 중소기업의 비중이 88.6%라는 것이다. 글로벌 초일류 기업이 포진한 대기업 집단과 한계기업이 많은 중소업계의 영업이익이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특히 정상 중소기업의 영업이익률은 평균 6.0%로 대기업 전체(6.3%) 영업이익률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영업이익률이 -5.1%에 불과한 부실 중소기업을 합치면 중소기업 전체 평균 이익률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지나친 보호는 '피터팬 증후군' 키워=중기적합업종, 중소기업제품 정부구매 등 중소기업을 보호하는 진입장벽은 지나치면 독(毒)이 된다. 중소기업들이 경쟁이 제한된 시장 안에서 서로 '땅 따먹기'에 집중하며 안주한 채 성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른바 '피터팬 증후군'이다.
실제 2010년 국정조사 결과 방위사업청에 식품을 납품하는 업체 201곳 중 식품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HACCP) 인증을 받지 않는 등 자격미달인 업체는 전체 66.2%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군납업체는 개구리 김치 등 경쟁의 무풍지대에서 온갖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팀스 사태 역시 피터팬 증후군의 결과물이다. 2010년 가구업체 퍼시스는 조달시장에 머무르기 위해 인적분할을 통한 자회사 팀스를 설립했다. 한 중소가구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3ㆍ4분기까지 2,033억원의 매출액을 거둔 퍼시스의 수출 비중은 10%에도 못 미치는 176억원"이라며 "퍼시스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크기보다는 경쟁이 없는 조달시장에 머무르는 길을 택했다"고 말했다.
◇기존 제도 내실 운영이 먼저=전문가들은 중소기업들이 장기적인 경쟁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하는 게 우선이라고 보고 있다. 아울러 납품단가 조정협의제 등 기존 제도가 현장에 제대로 뿌리 내릴 수 있도록 정책당국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병기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부실 중소기업들이 많으면 (정상기업에 가야 할) 자본ㆍ인력을 흡수해 정상기업이 크지 못하는 '발목잡기' 현상이 나타난다"며 "은행과 보증기관에서 신용평가를 강화해 기업인수합병(M&A), 사모투자전문회사(PEF) 등을 통한 민간차원의 구조조정을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세종 중소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기업이 성장단계에 맞춘 중소기업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특히 기업의 영세화를 막기 위해 고용ㆍ투자 등 규모를 키운 기업에 세액공제, 연구개발(R&D) 지원 등 성장에 대한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또 그는 "기존 제도도 운영만 잘하면 도움이 될 제도들이 꽤 있지만 현장에서 작동하고 있지 않다"며 "납품단가 조정협의제는 납품단가 조정의 신청권은 조합에 있고 협의권은 해당 기업에 있어 기업들이 제대로 신청을 못하는데 이 부분을 개선하고 상급업체의 보복이 있을 경우 법 적용을 엄격하게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