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죽이지 마라" 벌거벗겨진 그들
[이슈 인사이드] 신체적 불편은 같은데 차별… 보호 못받는 '벌거벗은 인권'목소리 커지는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김경미기자 kmkim@sed.co.kr
개별수요 파악 안한채 차등 지원… 1급만 장애인 활동 보조 서비스"불구 강조하도록 내모는 상황"복지 수준 OECD 국가 중 최하위가족 있더라도 정부 도움 절실예산확대 등 사회안전망 강화를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장애계가 슬픔과 분노로 들끓고 있다. 불과 두달 사이 2명의 젊은 목숨을 허망하게 보낸 사건이 촉매제 역할을 했다.
지난 9월 근육병을 앓고 있던 1급 장애인 허정석(33)씨가 활동보조인이 퇴근한 뒤 사고로 인공호흡기가 빠져 가뿐 숨을 몰아 쉬던 끝에 결국 숨을 거두었다. 10월에는 평소 장애인 권익운동가로 활동해오던 뇌병변 1급 장애인 김주영(33)씨가 집안에서 일어난 화재로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불이 난 걸 알고 안간힘을 다해 119에 신고까지 했지만 불과 몇 발짝 떨어진 현관문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누군가 곁에서 그의 인공호흡기를 다시 끼워줬다면, 누군가 그녀를 휠체어로 옮겨줬더라면 그들은 결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이 평소 요구해온 것처럼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를 24시간을 늘려 주기만 했다면 이런 비극은 막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현재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다. 현행 장애인복지법 기준에 따르면 허 씨는 돌봐줄 사람이 있는 부모와 함께 살았기에 인공호흡기조차 꽂을 수 없는 신체적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하루 3.3시간 가량(월 100여 시간)의 지원밖에 받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다. 이 제도는 현재 1급 장애인만을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들과 같이 일상생활에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중증장애인이 35만 명이 넘지만 약 5만명 만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정부가 내년부터 대상자를 2급까지 늘리겠다고 했지만 뇌병변 환자의 경우 4급에 해당되는 사람들도 도움 없이는 움직이기 힘든 경우가 많다.
많은 장애인활동가 및 전문가들은 더 이상 개별수요자의 욕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1~6등급이라는 숫자만으로 일괄 제공되는 식의 기존 복지체계로는 결국 비극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장애인등급제 폐지'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시작으로 국내 장애인정책의 큰 틀을 바꾸기를 요구하는 이유다.
◇등급과 등급 사이… 개인은 사라져=우리나라는 지체ㆍ뇌병변ㆍ시각ㆍ청각ㆍ언어ㆍ지적장애 등 총 15가지 장애 유형을 장애의 경ㆍ중에 따라 1~6등급으로 나누는 장애인등급제를 운영하고 있다.정부는 이 제도를 통해 국내 장애인의 현황을 파악하고 지원을 차등화한다. 장애인복지의 기본이자 기준이 되는 제도인 셈이다.
서비스와 혜택을 제공하는 정부 측은 등급제 등을 통한 평가는 한정된 자원을 효율성 있게 배분하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장애등급제가 있는 곳이 우리나라와 일본뿐이라지만 독일 등 선진 외국들도 등급만 없지 장애율을 사용하는 식의 세분화는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국내에서 운영되는 장애등급제는 분명히 여러 모순을 가지고 있으며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정부의 혜택과 서비스가 수요자의 요구보다 장애의 경중에 따라 일괄적으로 제공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대퇴부 절단의 경우 1급에 준하는 중증장애지만 극심한 고통으로 다리를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은 기능상실이 아니기에 급수가 3~4급 이하로 크게 떨어진다. 두 사람이 비슷한 수준으로 걷기 힘들다는 사실은 사라지고 중증장애인과 경증장애인이라는 구분만이 남아 한 사람은 활동지원을 받고 다른 이는 못 받게 되는 셈이다.
등급 간 혜택의 격차가 큰 것도 문제다. 소득 등에 따라 월 2~15만원씩 지급되는 장애인연금의경우 1,2급과 중복장애를 가진 3급 장애인에게만 제공된다.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 역시 현재 1급 장애인들에게만 지원된다.
장애인단체의 한 관계자는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받기 위해 많은 장애인들이 내가 더 불구라는 것을 강조해야 하는 상황인 셈"이라며 "재활훈련을 열심히 하면 등급이 외려 낮아져 혜택이 줄기에 재활에 대한 의지도 꺾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장애인등급제 및 등록제가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고착화시킨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우리나라가 인정하는 총 15가지 장애유형은 신체절단 혹은 기능상실로 인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정신장애 역시 뇌병변 및 지적장애 등 뇌손상으로 인한 경우만 인정되곤 한다.
남병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실장은 "스웨덴의 경우 모국어를 하지 못하는 이주민도 소위 '장애인'으로 인정하는 등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장애를 신체적 제약을 가진 자가 아니라 사회적ㆍ환경적으로 특별한 돌봄을 필요로 하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만이 손상으로 인한 장애만 인정하는 등급제를 실시하며 아직도 '장애인=불구'라는 등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족이 있어도 돌봄은 필요=아울러 장애인들은 장애인을 비롯한 취약계층에 대한 복지를 더 이상 가족에게 짐 지우지 말고 정부가 제대로 책임져 줄 것을 요구한다. 부양의무제의 폐지다.
부양의무제는 장애인복지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복지 분야에서 지원대상을 선정하는 하나의 기준점이다. 우리 정부는 기본적으로 "모든 부양의무는 1차적으로 가족에게 있으며 그것이 힘들 경우 정부가 돕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부양의무제에 대한 찬성 의견도 꽤 많다. 가족에게 다른 가족을 돌보는 책임조차 지우지 않는다면 가족의 해체가 더욱 가속화될 수 있다는 우려다.
하지만 정부가 장애인 등 취약계층의 생계ㆍ복지 책임을 그 가족들에게 지움으로써 정부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은 피해가기 어려워 보인다.
보건사회연구원은 지난해 발간한 보고서를 통해 "우리나라의 장애인복지 수준이 멕시코와 더불어 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며 "그 이유는 장애인 복지에 대한 예산 투입이 매우 적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2011년 현재 장애인복지분야 예산은 1조2,821억원으로 복지재정(86조3,929억원)의 1.5%에 불과하다. 2007년 기준 우리나라 GDP 대비 장애인복지예산 비중은 0.6%로 터키(0.1%)와 멕시코(0.1%)를 제외하고 전체 OECD 국가(평균 2.1%) 가운데 가장 낮다.
매년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는 것만이 위안이지만 다른 복지분야의 증가세와 비교하면 참담하다. 2008년~2011년간 중앙정부의 장애인복지예산의 연평균 증가율은 5.3%로 같은 기간 복지재정의 연평균 증가율(8.1%)에 미치지 못했다. 2003년~2011년 보건복지부 사회복지 분야별 예산 증가율을 살펴봐도 보육가족 및 여성 예산이 연평균 537.6%씩 증가하는 동안 장애인복지예산은 연평균 11.2%씩 늘어나는데 그쳤다.
현근식 장애인정책모니터링센터 연구위원은 "우리나라의 장애인 예산은 OECD 평균치의 4분의 1 에 그치며 물건 하나 짚기 힘든 최중증장애인을 위한 국가 수당이 주거를 포함해 월 60만원 수준"이라며 "장애인의 자립도 분명히 필요한 일이지만 사회 최약자층인 중증장애인을 위한 돌봄이 이 정도 수준밖에 안 된다는 것은 결국 국가 사회 안전망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