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도체산업에 폭풍과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미국의 마이크론테크놀로지, 유럽의 인피니온 등이 상계관세를 무기로 하이닉스의 목을 조르고, 삼성전자엔 강한 압박을 가하고 있다.
지난달 미국과 EU는 하이닉스반도체에 57.37%와 33.3%의 상계관세 예비판정을 각각 내렸다. 하이닉스의 반도체 수출가격은 관세율 만큼 높아져 미국과 EU로의 수출 길이 막히게 생겼다.
1%미만의 미세판정을 받은 삼성전자야 관세에 대한 부담은 제로수준이지만 상계관세 관련 조사를 면할 수는 없었다. 지난달 말 미국 상무부는 상계관세조사를 핑계로 삼성전자의 경영기밀사항까지 집중 조사하고 돌아갔다.
우리 정부는 이 와중에 정책적, 정치적 보호역을 방기한 채 그저 바라만 보는 입장이다. 안팎으로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바람막이 하나 없이 표류하고 있다.
◇`하이닉스 죽이기` 사각파도= 마이크론테크놀로지와 인피니온의 `하이닉스 죽이기`는 깊은 IT불황에서 비롯됐다.
IT산업이 사상초유의 장기불황을 이어가면서 세계 D램업체들은 최악의 경영위기에 빠졌다. 반도체가격은 생산가를 밑도는 수준까지 곤두박질쳤고, 업체들의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마이크론은 9분기 연속적자를 기록했고, 인피니온과 하이닉스, 타이완의 난야테크놀로지, 일본의 엘피다 등도 매분기 큰 폭의 적자를 내고 있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내심 누구든 지금의 무한 전쟁터에서 빨리 사라져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 하이닉스반도체가 가장 먼저 `제물`로 지목된 양상이다. 지금 하이닉스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목조르기는 어찌보면 세계 D램업계의 암묵적 야합이기도 하다.
미국과 유럽의 하이닉스에 대한 상계관세 예비판정에 이어 타이완과 일본 반도체업체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최근의 정황을 보면 타이완과 일본의 D램업계들까지 `하이닉스 죽이기` 대열에 동참할 가능성이 적지않다.
외신에 따르면 난야 테크놀로지의 주도로 대만의 4개 주요 D램업체는 공동으로 타이완 정부에 하이닉스의 D램 수입품에 상계관세 부과를 요청하기로 의견을 모은 바 있다.
또 90년대말 현대전자(하이닉스의 전신)과 LG반도체를 상대로 상계관세 소송을 제기한 전력이 있는 일본 반도체업계까지 `하이닉스 죽이기`에 끼여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하이닉스는 73%의 해외시장을 송두리째 상실할 수도 있다. 지난해 하이닉스의 수출총액은 17억6,600만달러. 이중 미국 4억6,000만달러(26%), 유럽 2억7,200만달러(15%), 타이완 3억4,700만달러(20%), 일본 2억1,700만달러(12%)였다. 4개 시장을 모두 합치면 12억9,600만달러로 총수출의 73%를 차지한다.
최석포 우리증권 수석연구원은 “3년 넘게 이어온 IT불황으로 인한 D램 공급과잉으로 전세계 D램업체들은 한결같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며 “경쟁업체의 퇴출을 간절히 바라는 상황에서 D램 업체들이 하이닉스 압박에 유혹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 조사단, 삼성전자에 `칼날`= 지난달 말 하이닉스에 대한 한국정부의 자금지원 조사를 주목적으로 방한한 미국 상무부가 엉뚱하게 삼성전자에 대한 집중조사를 벌였다.
미국 상무부는 연구개발지원 보조금 0.01%를 포함해 모두 0.16%의 미소마진 예비판정을 받은 삼성전자에 대해 당초 일정을 하루 연장해가며 지난달 21일부터 29일까지 관련정보를 수집했다. 이들은 삼성전자의 기흥공장은 물론, 최첨단 공법으로 건설하고 있는 12인치 웨이퍼 전용라인이 있는 화성공장에 대한 주도면밀한 조사를 벌이고 돌아갔다.
미국 상무부의 삼성전자에 대한 이번 조사는 마이크론 측의 주문에 따른 것으로 관측된다. 마이크론은 지난해 하이닉스 인수협상 과정에서 하이닉스에 대한 특급비밀까지 모두 챙긴 바 있어 이번 삼성에 대한 조사를 통해 한국반도체산업 현황을 손금 보듯 헤아릴 수 있게 됐다.
(상계관세 조사일지)
(2002년)
▲6월10일= 인피니온, EU에 한국산 D램 상계관세 제소
▲7월25일= EU, 상계관세 조사개시 및 질의서 송부
▲9월23일= 한국, EU 질의서에 대한 답변서 제출
▲11월1일=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미 상무부에 한국산 D램 상계관세 제소
▲11월21일= 미 상무부, 상계관세 조사개시 결정
▲12월1-14일= EU 실사단, 방한 실사 실시
▲12월16일= 미 국제무역위원회(ITC), 산업피해 예비판정 발표
(2003년)
▲4월1일= 미 상무부, 보조금 예비판정 발표
▲4월21일= 미 상무부, 방한 실사 실시(5월3일까지)
▲4월24일= EU, 예비판정 발표
▲6월14일(예정)= 미 상무부, 보조금 최종판정
▲7월29일(예정)= 미 ITC, 산업피해 최종판정
▲8월24일(예정)= EU, 최종판정 예정
"삼성 독주막자" 세계업계 짝짓기 활발
올들어 전세계 반도체업체들의 `짝짓기`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들은 노골적으로 삼성전자의 독주를 견제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특히 올해 초 독일의 인피니온은 대만의 난야 테크놀로지와 생산협력을 시작하면서 삼성추격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D램업계 세계 4위였던 인피니온은 난야와의 협력에 힘입어 최근 하이닉스를 따돌리고 3위로 한계단 올라섰다. 두 회사는 앞으로 12인치웨이퍼 공장을 공동으로 설립하고 하반기부터 가동할 계획이다.
인피니온의 최고경영자(CEO)인 울리히 슈마허 회장은 최근 “난야와의 연합을 더욱 강화해 2006년에는 삼성전자를 제칠 것”이라며 삼성의 독주를 견제하겠다는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인피니온은 또 지난달 2일 중국 상하이의 반도체주문생산업체인 SMIC과 회로선폭 0.11마이크론 공정기술과 12인치 웨이퍼 제조기술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D램을 공급받기로 계약을 맺었다. 이는 중국시장 선점과 삼성 추격을 겸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이에 앞서 일본의 엘피다는 향후 5년간의 D램 생산물량을 SMIC에 위탁했다.
플래시분야에서는 지난달 1일 미국의 AMD(5위)와 일본의 후지쓰(6위)가 플래시메모리를 통합하기 위한 합작사를 설립하기로 하고 MOU(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두 회사가 합쳐지면 삼성전자를 제치고 세계 2위 업체가 된다.
민후식 동양증권 수석연구원은 이에 대해 “최근 메모리분야에서 `홀로서기`에 힘이 부친 세계적인 업체들이 전략적 제휴를 통해 새로운 생존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며 “일종의 실험적 단계일뿐 삼성전자의 글로벌 위상에 커다란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D램값 하락 위기인가 기회인가
반도체가격이 끝 모르게 추락하고 있다. 반도체 값이 떨어지면 생산업체의 수익이 나빠져 국내반도체산업에 악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세계최강 업체 삼성전자에게는 손익계산이 다를 수도 있다. D램값 하락폭이 커지고, 가격회복이 지연되면서 세계 D램업계는 강자에게 유리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9달러를 육박하던 D램값이 최근 3달러 초반까지 밀렸다.
D램값이 3달러선으로 밀린 것이 지난 2월이후 벌써 4개월째. 9분기 연속 적자에 시달리는 미국의 마이크론이나 상계관세 압력에 짓눌린 하이닉스, 만성 적자에 고통을 받고 있는 독일의 인피니온 등은 요즘 `죽을 맛`이다. 원가를 밑도는 가격에 물건을 팔면 팔수록 적자가 쌓여가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들 업체의 D램 생산원가는 4달러~6달러 수준으로 알려졌다.
반면 삼성전자는 최악의 IT불황에도 불구하고 올해 1ㆍ4분기에도 대규모 순익을 남겼다. 현재 삼성의 D램 생산원가는 3달러 초반. 오는 7월께 12인치 웨이퍼와 90나노 공정을 가동하면 생산원가를 2달러대로 낮출 수 있다. 이렇게 보면 D램값 하락은 삼성이 경쟁업체와의 격차를 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다.
전병서 대우증권 리서치센터 본부장은 “최근 3년간 D램값이 생산원가를 밑돈 적은 모두 세차례 있었다”며 “이 때마다 삼성전자는 후발 주자들을 멀찍이 따돌리면서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고 말했다.
D램 값이 앞으로 얼마나 떨어질지 점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IT불황이 비수기와 맞물려 가격이 2달러 초반까지 밀릴 수도 있다고 전망한다.
D램값이 삼성의 생산원가 아래인 2달러대로 무너지면 상황은 어떨까. 이 경우 삼성도 손해를 보면서 D램을 팔아야 하기 때문에 당장 수익은 나빠질 것이다. 그러나 경쟁업체들이 도저히 생산을 이어갈 수 없는 처지에 몰려 대규모 감산과, 시장퇴출 사태가 이어진다면 삼성은 오히려 1위의 아성을 든든히 쌓을 수 있게 된다.
진영훈 대신증권 연구원은 “D램값이 2달러 초반이면 현금성비용(캐시코스트ㆍ공장을 가동하지 않는 것이 훨씬 유리한 가격)을 밑도는 수준이 된다. 하이닉스와 마이크론 등 한계에 도달한 기업들은 어쩔 수 없이 본격적인 감산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문성진기자 hnsj@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