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 대한민국 금융에 실망했다


대한민국 금융은 유독 격랑의 세월을 보냈다. 금융선진국과 비교하면 작은 규모지만 풍파는 참으로 거셌다. 환란의 악몽 속에 우리의 선배 금융인들은 눈물을 쏟으면서 잘려나갔다. 5개 은행의 퇴출로만 9,841명이 직장을 떠났다. 보험∙증권 등까지 합하면 수만, 수십만명이 집으로 돌아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금융산업은 13년 전 '피의 구조조정'이 남긴 유산을 지우느라 부심하고 있다. 주인을 찾지 못하는 우리금융이나 외국인의 놀이터로 유랑하는 외환∙SC제일은행은 우리 금융산업의 가슴에 패인 아픔의 흔적들이다. 촌극으로 그친 대출중단 사태 기자는 이런 구조조정의 물결을 맨 앞에서 겪었다. 빨간 띠를 두른 노조원들을 볼 때면 이따금 감상에 젖어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그래도 믿음이 있었다. 언젠가는 우리 금융산업이 선진의 문턱에 들어설 것이라고. 제조업이 그랬듯 말이다. 하지만 소망은 찢겨지고 있다.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들은 너무나 많은 실망을 주고 있다. 멀게 갈 것도 없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대출 중단 사태는 우리 은행산업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촌극이었다. 금융의 본질이 소비자와의 신뢰 형성에서 출발하는 것을 아는 뱅커라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은행'이라는 단어를 떼어 버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마저 품게 한다. 인플레이션의 망령 속에서 '뱅크'라는 이름조차 지워진 소시에테제너럴과 같은 프랑스 은행들처럼 말이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조선시대도 아니고 고려시대 금융(본지 인터뷰 중)"이라고 힐난했지만 그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오늘날의 대한민국 금융산업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자신 아닌가. 대출 중단 사태야 그나마 경제의 고름과 같은 가계 대출의 부실을 떼어 내는 과정에서 생긴 통과의례라고 치자. KB와 신한지주에서 불거졌던 지배구조의 문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국민은행은 환란 이후 은행 통폐합을 통해 태어난 가장 큰 금융회사다. 통합 당시 은행의 CEO가 몇 년 안에 세계 50위 안에 들어설 것이라고 호언 장담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지금 KB의 모습은 어떠한가. 순위는 오히려 퇴보했고 역대 행장들은 지배구조의 흠결을 드러냈다. 신한 역시 조흥이라는 100년 은행을 흡수하면서 리딩뱅크의 모습으로 태어나기를 기대했지만 지금의 모습은 그리 탐탁지 않다. 은행뿐 아니다.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만들겠다는 것이 몇 년 전인데 그 흔한 헤지펀드 하나 보이지 않는다. 구호만 난무한다. 저축은행 대주주들은 썩은 경영행태로 예금주들을 길거리로 몰았다. 신뢰 재구축 방법 고민해야 금융회사가 이러니 예금주들도 '은행도 망할 수 있다' '내 돈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잃어 버린 채 "내 돈을 달라"며 떼를 쓰는 것이다. 정치인들까지 여기에 동조해 '금융 포퓰리즘'의 동아줄을 내밀고 있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까지 하다. 이것은 분명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우리 금융산업은 이렇게 초라한 몰골로 놓여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의 금융 CEO들은 수십만명이 흘린 눈물을 품에 안은 채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다. 그들이 만든 '눈물의 비디오'를 기억한다면 금융산업을 이대로 놓아둬서는 안 된다. 지금 절실한 것은 신뢰의 숨통이다. 신뢰의 리빌딩(재구축)을 진정으로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CEO들은 맘속 깊이 고민해야 한다. 떠나간 은행원들에게 두 번 죄를 지어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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