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금융위원회가 '금융권 고용문화 개선 방안'을 발표하자 구직자들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기술보증기금을 비롯한 18개 금융공공기관과 금융협회가 신입사원 채용 때 자격증과 어학 점수 등 '스펙' 대신에 창의성과 업무 능력 중심의 채용문화를 정착시키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렇다 할 스펙을 갖추지 못한 취업 준비생들도 금융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으로 생각됐기에 이들이 술렁거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국주택금융공사가 9일 '스펙 초월'이라는 그럴싸한 문구를 앞세워 채용형 인턴 모집 공고를 냈지만 스펙을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택금융공사는 지원서에 어학 점수와 자격증 기재란은 없앴지만 출신학교와 학점은 반드시 표시하도록 했다. 모집 공고가 나가자 구직자들 사이에서는 "출신학교와 학점은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스펙 중의 스펙인데 이런 것을 놔두고 무슨 스펙 초월이냐"며 불만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주택금융공사의 사례는 우리나라에서 스펙을 없애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스펙 초월이 어려운 것은 구직자들도 마찬가지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최근 구직자 1,000명과 기업 인사 담당자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바에 따르면 청년 구직자 47.4%는 취업 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소로 토익 등 외국어 점수를 꼽았다. 이어 출신학교(29.2%)와 공모전 경험(11.9%)이 뒤를 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취업을 준비하는 구직자들은 스펙을 따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을 쏟아붓고 있다. 청년 노동조합인 청년유니온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어학 점수와 자격증 등 평균 정도의 스펙을 갖추는 데 1,500만원 정도의 비용을 지출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여기에 대학 등록금을 포함하면 1인당 4,000만~5,000만원 정도를 스펙을 쌓는 데 투자하는 셈이다. 구직자들이 부족한 스펙을 쌓기 위해 대학 졸업을 미루는 사례도 적지 않다.
결국 기업도 구직자들도 여전히 스펙의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스펙에 집착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학교 교육 내용과 산업 수요 간의 불일치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 산업 현장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 업무에 적합한지를 평가할 잣대가 없다 보니 기업 입장에서는 어학 점수나 자격증 같은 그나마 객관화가 가능한 스펙을 가지고 인력을 뽑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얻은 자격증은 명확한 기준이 없이 개발되다 보니 산업 현장에서 바로 써먹을 수가 없고 이 때문에 기업은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 신입사원을 재교육해야 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래도 학교 교육과 산업 수요 간의 괴리를 좁혀주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학교 교육과 일자리가 연계됨으로써 입사 후 재교육이 필요 없는 실전형 인재 양성이 가능해진다. 이런 면에서 대안으로 거론되는 것이 국가직무능력표준(NCS)이다. 이는 산업 현장에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지식과 기술, 소양 등의 내용을 국가가 산업부문별로 체계화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NCS 도입의 속도가 너무 늦다는 데 있다. 박근혜 정부는 학교 교육과 산업 수요 간의 불일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NCS 개발에 심혈을 기울여왔지만 올해 말에나 가야 겨우 능력표준 개발이 끝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표준이 개발되더라도 실제 산업 현장에 적용되기까지는 앞으로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정부에서 개발한 표준에 맞춰 훈련기관에서 학습 모듈을 만들어야 하고 각종 국가기술자격증도 NCS에 맞게 바꿔야 한다. 이 작업이 끝나려면 앞으로도 최소 2~3년 정도는 더 필요하다. 자칫하다가는 NCS를 제대로 시행해보지도 못하고 박근혜 정부 5년이 다 지나갈지도 모른다. 산업현장에서 써먹지도 못하는 스펙을 쌓느라 천문학적인 시간과 비용이 투입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하루빨리 대안이 마련돼야 한다. 정부가 NCS 개발을 서둘러 능력 중심의 사회가 앞당겨졌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