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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 기행의 마지막인 산하이관(山海關)에 가기 위해 베이징역에서 기차를 탔다. 지평선이 보이게 쭉 뻗은 평야를 따라 동쪽으로 2시간 달린 특급열차는 허베이성(河北省) 친황다오(秦皇島)역에 도착했다. 산하이관에 도착하려면 역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30분은 들어가야 한다. 산하이관은 친황다오시의 동부지역에 있으며 베이징의 정동쪽 300㎞ 위치다. 산하이관을 기점으로 서남쪽은 허베이성, 동북쪽은 랴오닝성(遼寧省)으로 나뉜다. 중국과 만주의 경계선이다.
산하이관에 가까워지면 시내를 가로지르는 성벽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도로는 성벽 아래로 뚫린 터널을 달린다. 만리장성이 도시를 거의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기 때문에 그나마 남아 있는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 밑으로 길을 냈다.
드디어 산하이관에 도착했다. 장성은 성벽이기 때문에 성문이 필요한데 중요한 위치에 무슨무슨 '관'이라고 이름 붙인 관성(關城)을 쌓았다. 관성은 대부분 사각형의 성채가 딸려 있다. 자위관이 그렇고 산하이관도 그렇다. 최근 보수공사 과정에서 산하이관 관성 내부의 건물도 증축했다고 한다. 기념품이나 음식을 파는 상가들이 많다.
이제까지 봐온 만리장성에 익숙해서인지 산하이관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냥 중국에 흔히 있는 성문 같다. 성벽의 높이가 12m로 다소 클 뿐이다. 이곳이 6,000㎞ 만리장성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전통시대 마지막 왕조들인 명나라와 청나라의 운명을 갈랐던 산하이관이다.
산하이관 지역의 지형은 독특하다. 베이징 북쪽은 줄곧 산악지역인데 이 산들이 농경지역과 유목지역을 가르고 있다. 산맥은 각산이라는 곳을 마지막으로 보하이만(渤海灣) 가까이에 와서 뚝 끊긴다. 그리고 너비 10㎞ 정도의 평지가 있다. 동몽골이나 만주에서 베이징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이곳을 지나칠 수밖에 없다. 명나라 때 산이 바다와 만나는 가장 좁은 지역에 성벽을 쌓아 만리장성을 최종 완성했다. 산하이관이라는 명칭은 '각산(角山)'과 '발해(渤海)'에서 한 글자씩 딴 것이다.
산하이관이 구축된 것은 명나라 중기인 16세기. 명나라 이전에도 이곳에 성벽과 관문이 있었겠지만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는 당연히 전략적인 고려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장성을 쌓으면서 역점을 둔 것은 당연히 자신들의 영토방어다. 특히 수도가 가장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진나라가 기원전 3세기께 지금의 뤄양(洛陽) 인근인 셴양(咸陽)에 자신들의 수도를 세웠고 한나라ㆍ당나라는 수도를 각각 뤄양과 장안(시안ㆍ西安)에 둬 중국 서부지방이 역대 왕조의 중심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리장성도 이들 수도의 북방에서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시대가 지나면서 수도가 동쪽으로 조금씩 이동했는데 10세기 송나라의 수도는 카이펑(開封)이었다. 통일왕조의 수도가 베이징에 건설된 것은 13세기 몽골족 원나라 때가 처음으로 몽골족을 북쪽으로 밀어낸 명나라도 역시 베이징에 수도를 뒀다.
유목민족의 중심세력도 동몽골로 이동했다. 후에 청나라가 되는 여진족이 흥기하면서 만주도 위협적인 지역이 됐다. 수도 베이징의 방어가 최우선 쟁점이 된 것이다. 명나라는 만리장성을 보하이만까지 확장하고 산하이관 건설과 함께 주변을 요새화했다. 산하이관 구역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서쪽 산악지형은 각산산성, 가운데는 산하이관, 그리고 동쪽에는 라오룽터우(老龍頭)를 포함하는 닝하이성(寧海城) 구역이다.
산하이관이 명나라 200년 피와 땀의 결정체이기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진 적은 없다. 명나라는 청나라의 건국과 함께 만주를 빼앗기지만 산하이관 밖에서 잘 막아냈었다. 청과 대치한 명나라는 내부반란으로 붕괴한다. 이른바 '이자성의 난'으로 베이징이 함락되고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자살하면서 당시 산하이관을 지키던 명나라 장수 오삼계는 청군에 항복한다. 청나라 군대는 이 오삼계의 명나라 군대를 앞세우고 뻥 뚫린 산하이관을 그대로 통과해 이자성군을 몰아내고 베이징을 함락시킨 후 결국 중국 전체를 정복하게 된다.
산하이관이 그나마 다른 장성 부분과 달리 청나라 전 시기에 걸쳐 온전했던 것은 동북아시아 교류의 핵심 통로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동몽골과 만주ㆍ한반도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산하이관을 반드시 통과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통행을 규제하는 용도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청나라는 자신들의 고향인 만주로의 중국인(한족) 농민들의 이주를 금지하면서 산하이관을 철저히 통제했다.
1780년 중국을 방문한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서달이 이 관(산하이관)을 쌓아 오랑캐를 막고자 했으나 오삼계는 관문을 열고 적을 맞아들였지. 천하가 평온할 때 부질없이 지나는 상인과 나그네들의 비웃음만 사고 있을 뿐이네"라며 산하이관 수비대의 지나친 검색과 단속을 비판했다.
산하이관의 소외는 시대의 변화 때문이다. 유목세력이 쇠퇴하고 동북아시아 교류로가 해양으로 이동하면서 만리장성과 산하이관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결국 청나라 말기 19세기 후반부터 산하이관은 방치되고 파괴된다. 만주로의 한족 이주가 허용되면서 장성은 단순히 교통을 막는 장애물에 다름 아니었다. 이어 군벌 간의 내전, 일본의 침략에 이어 1960년대 '문화대혁명'까지 거치면서 거의 사라져버렸다.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 유적복원을 시작했지만 주요 지점 외 대부분의 성벽이 여전히 잔해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