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과학기술정책의 대부로 꼽히는 히라사와 료 도쿄대 명예교수가 지난 6월 한국을 찾았다. 언론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방한은 과학계의 적잖은 관심을 끌었다. 일본 최고 연구집단인 ‘산업기술종합연구소(AIST)’를 탄생시킨 장본인인데다 오랫동안 우리 과학정책을 지켜본 이방인라는 점 때문이다.
히라사와 교수는 한국 과학계의 거목으로 원자력개발의 기초를 닦은 고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과 오랜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도 우리 과학정책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인사이기도 하다.
그는 1박2일의 짧은 방한 일정을 마치면서 뼈 있는 말을 남겼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작심한 듯 “이대로 가면 한국의 과학기술정책은 위험하다”며 일성을 날렸다. 이어지는 그의 말은 기자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한국은 대통령 임기인 5년마다 과학기술계가 흔들린다. 미국ㆍ일본 등에서 그런 케이스를 본 적이 없다.”
일본 노 과학자의 기우(杞憂)일까. 한국 과학의 산실인 대덕연구단지에서 ‘과학자들이 짓밟히고 있다’는 자조와 한탄이 나오는 것을 보면 기우는 아닐 것 같다.
전례 없는 과학 출연연구소 소장 일괄 교체, 방향성이 뚜렷하지 않은 연구기관 통폐합 추진, 연구원에 대한 지위 격하 및 예산 삭감 등으로 현재 과학계의 분위기는 말이 아니다.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우리는 노동자’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정책 당국과의 의사 통로도 막혀 ‘연구현장과 청와대 간 소통은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밖에 없다’라는 우스갯소리마저 파다하게 퍼져 있다.
더 큰 문제는 과학자들이 정권교체 때마다 반복되는, 특히 이번 정권에서는 더욱 심하게 진행되고 있는 정치 입김에 과학자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잃어가고 있다는 데 있다. 한 기초 출연연 연구원은 요즘 현실을 빗대어 “연구개발(R&D)예산을 늘리면 뭐하냐.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지 5년가량 됐다) 한국에서 과학자로 사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고 토로했다.
새 정부는 실용원칙하에 과학정책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당연히 큰 성과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과학, 특히 기초과학은 단시간에 승부가 나지 않는다. 인재와 오랜 기간, 그리고 비용, 일관된 정책의 싸움이다. 실용이라는 조급함이 가져올 폐해를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