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투리 일감만 맡기고 정부 예산마저 쥐꼬리… 영세업체 난립 부추겨
"과거에는 자본ㆍ노동이 산업생산의 핵심이었다면 이제는 창의적인 디자인이 제품의 경쟁력을 결정할 것입니다. 우리 기업들이 조금만 더 디자인에 투자하면 세계무대에서 더 큰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지난 2008년 10월 '서울디자인올림픽 2008'에 참석, 축사를 하며 디자인 투자를 강조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12년 현재 디자인전문업체들의 사정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아쉽게도 디자인업계의 형편은 지난 4년간 나아진 게 없다. 만성적인 불공정거래에 시달리는 데다 이로 인한 극도의 영세화, 저임금, 고용불안 등에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디자인 관계자 대부분은 앞으로 정부가 좀더 전략적인 의지를 가지고 산업 육성책을 펼치지 않으면 앞으로 디자인산업의 미래는 없다고 입을 모은다.
19일 한국디자인진흥원에 따르면 지난 2010년 기준으로 국내 디자인산업 규모는 총 7조900억원. 지난 2008년 5조2,312억원에 비해 1조8,000억원 가까이 늘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디자인업계에서도 심각한 양극화가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기업 등 일반회사가 디자인에 투자한 금액이 2년간 3조3,476억원에서 4조3,687억원으로 1조원 이상 증가하고 정부ㆍ공공기관의 투자액도 같은 기간 2,230억원에서 3,422억원으로 1,000억원 이상 늘어났다. 반면 디자인전문기업들의 매출액은 1조6,613억원에서 1조9,596억원으로 3,000억원이 채 증가하지 않았다.
디자인전문기업 매출이 2년간 17.9% 증가한 사이 관련기업 수는 2만2,684개에서 2만7,077개로 19.3%(4,393개)나 늘어난 점까지 감안하면 사실상 개별 회사들의 실적은 더 악화된 셈이다. 게다가 디자인 전문기업들이 전체 디자인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8년 31.8%에서 27.6%로 4.2%포인트나 뒷걸음질쳤다. 숫자상 드러나는 디자인산업 발전의 과실이 오로지 대기업의 성과로만 채워지고 있는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내 디자인전문회사들의 현실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지난 2009년 기준으로 디자인전문업체의 평균 매출액은 6억1,529만원, 영업이익은 8,801만원에 불과하다. 업체당 종사자 수는 2010년 기준 5.48명으로 직원이 2~4명에 불과한 회사가 전체의 46.2%나 차지한다.
디자인전문기업의 A 대표이사는 "디자인회사는 제대로 된 기업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곳도 거의 없고 매출액이 10억원 이상 되는 곳은 20~30군데에 불과하다"며 "더욱이 업체별로 유능한 디자이너를 3명 이상 보유한 곳이 거의 없다"고 전했다.
일정 규모를 갖춘 기업형 회사가 거의 없는 관계로 고용이나 근무 환경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디자인회사 평균 종업원 수 5.48명 가운데 1.25명은 1년 이하 비정규직이며, 디자이너들의 평균 근속연수는 고작 5.06년에 그친다.
게다가 업계 초봉은 대체로 1,800만원 안팎에서 형성된다는 후문이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올초 집계한 대기업 신입사원 초임 평균(3,481만원)의 절반 수준이다. 이마저도 2010년 기준으로 디자인학과 졸업생 2만5,276명 가운데 1만1,304명만 취업하면서 취업률이 44.7%에 그쳤다. 대학에서 다른 전공자보다 상대적으로 비싼 학비를 지불하고 졸업한 디자이너들이 상대적인 박탈감을 크게 느낄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이 때문에 유능한 디자인과 졸업생 상당수는 국내 산업 발전에 이바지하기보다는 대학 디자인과 교수직 도전을 첫번째 목표로 꼽고 있다.
국내 디자인전문기업들이 이렇게 어려움에 빠진 것은 디자인업체에 대한 정부와 기업들의 수준낮은 인식 때문이다. 힘의 관계를 이용해 불공정거래나 지적재산권 침해를 일삼으면서 디자인업체의 성장을 저해하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정부와 기업을 막론하고 유명 디자인 제품이 나오더라도 대부분 지적재산권을 그들이 쥐려 하다 보니 아무리 유능한 디자이너도 명성을 얻을 수 없어 패션 부문을 제외한 세계적인 디자이너 탄생은 언감생심이다.
또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자체 디자인 투자에 집중하며 자투리 프로젝트만 전문업체에 맡기고 있는 데다 정부ㆍ공공기관마저 실패에 대한 위험회피로 디자인투자 예산을 잘게 쪼개 배치하면서 영세업체들의 난립과 전반적인 하향평준화만 부추긴다는 지적도 나온다. 1억원 이상 규모의 프로젝트가 실종되다 보니 대형 디자인업체는 나올 수도 없다는 것. 국내 유수 대기업에서 근무하던 디자이너조차도 한번 퇴사하면 영세 용역업체로만 전전하기 일쑤다.
A 대표는 "디자인회사가 분열된 영세 상태를 벗어나 일정 규모 이상으로 단합해 크려면 대형 프로젝트가 계속해서 나와줘야 한다"며 "고작 수백만원짜리 프로젝트를 주면서 불공정거래까지 하려고 하면 도저히 개선할 길이 없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디자인에 대한 사회인식 전환과 제도 정비 등 정부 차원의 노력이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디자인도 산업이란 인식을 갖고 동반성장 의지와 함께 전략적인 육성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다. 올해 한국디자인진흥원에 투자된 정부 예산은 420억원에 불과하며 지식경제부에도 관련 부서가 '디자인산업과'가 아닌 '디자인브랜드과'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점도 개선해야 한다.
최명식 경희대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는 "정부의 디자인 활성화 구호는 늘 정해진 예산만 집행하는 형식적인 수준에만 그치고 있다"며 "산업 덩치가 커지는 만큼 정부 차원의 총체적인 전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경원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디자인산업은 부처마다 업무가 다 분산돼 있어 일관성 없이 답답한 상황"이라며 "디자인이 정말 중요한 시점에 정부의 추진력은 더 약화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