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정부는 인민들이 원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한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하노이의 호찌민 광장. 서울경제 취재진이 사회주의 혁명의 지도자인 호찌민의 묘가 있는 이곳을 찾았을 때는 폭염으로 제대로 걷기도 힘든 날씨였지만 참배객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도이 모이’로 상징되는 경제개방이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국부인 호찌민이 내건 ‘평등’의 가치가 여전히 베트남 사회를 휘감고 있는 듯했다. 이처럼 평등이 중요한 베트남에서도 교육정책에서는 결코 평등을 내세우지 않는다. 초등학교 때부터 우열반을 운영해 ‘될성부른 떡잎’을 사회 엘리트로 길러낸다. 팜뚜엔 하노이사범대 언어학과 교수는 “학부모들이 좋은 공부환경을 원해서 우등반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라며 “교육부는 인민들이 원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우등반으로 엘리트 양성=베트남의 초ㆍ중ㆍ고등학교는 예외없이 우열반을 운영하고 있다. 대개 한 학년에 우등반 1~2개 반, 보통반 10여개 반 식이다. 우등반과 보통반은 교과내용은 물론 교사진마저 다르다. 학생들은 시험성적에 따라 우등반과 보통반을 오간다. 이렇게 걸러진 우등반 학생들은 정규수업이 끝난 뒤 오후에 교사들의 지도하에 특별학습을 받는다. 다낭 출신으로 하노이법대를 졸업한 응우옌티뚜옛마이씨는 “처음부터 시험을 봐서 반을 나누고 마지막 학기에 다시 시험을 봐서 반 배정을 한다”며 “가르치는 선생님 수준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선발된 우수 학생들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의 치열한 학습경쟁을 거쳐 하노이공대ㆍ하노이경제대 등 베트남 최고 명문대학에 들어간다. 호찌민은 베트남 전쟁 시기 이렇게 양성된 엘리트 수만여명을 전장터로 보내는 대신 소련ㆍ중국ㆍ북한 등에 유학시켰다. 이들이 전후 베트남을 재건하고 ‘도이 모이’를 추진하며 베트남을 ‘제2의 중국’으로 도약시키고 있는 주역들이다. 이 같은 우열반 운영에 대해 하노이인문사회대 관광학과 학생인 끼예우아잉씨는 “반 편성 때는 똑같이 시험을 치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며 “평등이란 결과가 똑같아야 하는 게 아니라 기회를 공평하게 주는 것”이라고 야무지게 답했다. ◇경쟁과 차이를 인정한다=하노이 남쪽 소도시인 링푹현에 사는 중학교 2학년생인 응우옌홍화양. 이 지역 명문인 하이바쯩 중학교 우등반 학생인 화양은 요즘 하루에 4시간만 자며 공부한다. 그녀는 “하노이에 있는 명문대학에 가는 게 목표”라며 “일주일에 세번 과외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학부모들에게 우등반 자녀는 집안의 크나큰 자랑이다. 학부모들은 이 같은 차별적인 엘리트 육성 방식에 반대하기는커녕 적극 지지하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이지만 교육에서만큼 ‘경쟁과 차이’를 십분 인정하고 있는 것. 따프엄호아 하노이공대 교수도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상관 없이 똑같은 시험을 본다”며 “우열반은 능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강조했다. 엘리트 교육에 대한 국민들의 컨센서스에 대해 베트남 정부도 굳이 평준화를 강요하지 않고 있다. 레칵히엔 교육부 선전국장은 “학부모들이 원하고 있는데 강제적으로 똑같은 교육을 시킬 수 없다”며 “특히 고등학교는 평준화하기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국경을 넘어 글로벌 탤런트로=‘도이 모이’ 이후 베트남 학생들은 영어 등 외국어 배우기는 물론 외국유학에 ‘올인’하는 분위기다. 국경을 넘어 글로벌 탤런트로 성장하고자 하는 열망에서다. 호아 교수는 “외국유학 기회를 주는 특별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한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며 “이런 제도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좋은 기회가 된다”고 말했다. 한국어가 유창한 응우엔응리엔(하노이외국어대 한국어학과 3년)씨는 “명문 중고등학교에는 미국인 교사가 있고 방과 후에는 특별 영어수업을 한 뒤 시험까지 본다”고 설명했다. 엘리트주의로 무장한 신흥 개발도상국 베트남과 과잉된 평등의식의 덫에 빠져 대학마저 차이를 없애려는 한국. 20년 뒤 이 두 나라의 서열이 지금과 같다고 과연 장담할 수 있을까. [인터뷰] 따프엉호아(TA PHUONG HOA) 하노이공대 국제협력실장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은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하노이공대는 졸업 때 학생들이 실용적인 주제의 논문을 쓰도록 하고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천재들만 들어간다는 하노이공과대학의 따프엉호아(사진) 국제협력실장은 상아탑이 현실을 개선시키는 실질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시간 넘게 이어진 인터뷰 내내 호아 실장은 사회와 담을 쌓은 채 현실과 괴리된 학문의 길만 가는 그런 대학은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줄곧 던졌다. 호아 실장은 "마지막 학기에 실용논문을 쓰게 해서 학생에게는 경험을 쌓게 하고 기업들에는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며 "훌륭한 실용논문은 언론에 대서특필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고 설명했다. 폴리머학과 교수인 호아 실장은 "폴리머과 졸업생 40명 중 8명이 실용논문을 작성 중"이라고 소개했다. 지난 56년 설립된 하노이공대는 베트남 최초의 기술대학으로 그동안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왔다. 졸업생 중에는 호아쭝하이 공업부 장관, 팜자키엠 부총리 등을 비롯해 고위관료들이 즐비하고 공업 분야 CEO는 셀 수 없이 많다. 하노이공대를 모태로 중부와 남부에 각각 다낭공과대학과 호찌민공과대학이 세워졌고 하노이건설대와 하노이지질대ㆍ하노이수질대 등이 갈라져 나왔다. 14개 과와 22개 연구소가 있으며 2,000여명의 석ㆍ박사 과정 학생과 단기 기술연수 과정 등을 포함해 4만여명이 재학 중이다. 호아 실장은 "상위 학생들은 심도 있게 공부할 수 있는 특정 프로그램에 들어가 기술 엘리트 교육을 받는다"며 "예를 들면 재능기술자 프로그램은 학점이 높아야 합격할 수 있는데 이 프로그램에 들어가면 책과 선생님을 고를 수 있고 장학금이 주어진다"고 밝혔다. 그는 또 "미국 유학기회가 있는 우수 기술자 프로그램에는 입학생 3,700명 중 400명만 들어간다"고 덧붙였다. [인터뷰] 레칵히엔(LE KHAC HIEN) 교육부 선전국장 "학교마다 전통과 역사가 있어 (획일적인) 평준화는 불가능합니다. 이는 하노이는 물론 중부ㆍ남부에 손꼽히는 명문 중고등학교들이 있는 이유입니다." 짙은 고동색의 목조골재들이 인상적인 베트남 교육부에서 만난 레칵히엔(사진) 선전국장은 굵은 뿔테 안경을 연신 추켜올리며 "인민들이 고르게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재양성을 위해서는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왜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교육평준화가 안되느냐"는 질문에 히엔 국장은 "예부터 베트남은 국자감에서 나라를 이끌 인재를 양성해온 오래된 교육철학을 갖고 있다"며 "인재를 우선시하는 것은 호찌민 전 주석의 교육관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히엔 국장은 "베트남 교육의 목적은 표준화ㆍ대중화ㆍ인재양성"이라면서 "엘리트를 기르기 위해 각 지방마다 명문 인재양성 학교가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핵심인재를 키우는) 좋은 학교의 세 가지 조건은 교과서ㆍ시설ㆍ교수진"이라고 정의한 뒤 "하노이에만 '쯔엉 디엠' 이라 불리는 명문 고등학교로 하노이암스텔담, 꾸억혹후에ㆍ레홍퐁ㆍ전푸ㆍ쭈반안ㆍ또빙지엔 등이 있다"고 소개했다. 우열반 수업이 보편화돼 있는 데 대해 히엔 국장은 "학습능력의 차이가 분명 있는데 무조건 똑같이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우열반 제도는 인민, 즉 학부모와 학생들이 희망해서 만들어진 제도"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굳이 나서서 엘리트 경쟁을 막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인터뷰 내내 히엔 국장은 베트남보다 한참이나 앞서 있는 한국에서 온 취재진이 왜 평준화와 우열반에 대해 자꾸 질문을 하는지 의아해 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취재진에게 "기회를 똑같이 주고 시험을 거쳐 엘리트 학급을 편성한다"며 "사회주의 국가라고 해서 그런 차이를 인정하는 게 잘못된 것이냐"고 반문했다. 이와 함께 히엔 국장은 베트남이 지난 2001년 대학별 본고사를 없애고 전국 대학입학고사로 대체한 것과 관련, "시험은 한 번만 보지만 학생들은 복수로 여러 대학을 지원할 수 있다"며 "그렇다고 해서 대학이 평준화되는 것은 절대 아니며 대학 평준화를 위해 만든 제도가 아니다"고 덧붙였다. 그는 "보다 공평한 기회를 주기 위해 동일한 시험을 치르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