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한국의 대표 CEO] 박종원 코리안리재보험 사장

인터넷·장기간병보험 등 히트 제조기<br>"현실과 타협하는 부서 문 닫아라"<br>부정적 생각 애초에 뿌리 뽑아


지난해 7월 세계 최고 권위의 재보험잡지인 영국 리인슈어런스(Reinsurance)지는 '2010 리인슈어런스 파워 리스트'(Reinsurance Power List)에 박종원 코리안리 사장을 21위로 올렸다. 이는 한 해 동안 세계 재보험산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건이나 기관, 인물을 선정해 발표한 것으로 세계 보험업계 인사로만 따지면 박 사장이 15위인 오른 셈이었다. 세계 보험업계 인사로 떠오른 그가 재보험과 인연을 맺은 시기는 외환위기 때인 1998년. 당시 코리안리는 재보험 시장 개방을 앞둔 상황에서 외환위기가 닥치자 보증보험 손실이 급증해 최대의 경영위기를 맞고 있었다. 도산 위기에 처한 회사에서 박 사장은 경영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전체 인원의 30%를 감축하고, 미구상 채권과 미지급준비금을 매각해 경영위기를 일단락시켰다. 과감한 구조조정은 2,800억원 적자가 예상됐던 회사를 37억원의 흑자로 전환시키는 기적을 일궈낸 것이다. 여세를 몰아 이듬해인 1999년에는 294억원, 2001년 681억원, 2010년 1,076억원이라는 경이적인 당기순이익을 거둬들였다. 1963년 설립 후 국가에서 재보험영업의 독점권을 인정해줬던 36년간 코리안리의 연평균 당기순이익은 23억원에 불과했으니 박 사장 취임 이후의 성과는 놀라움, 그 차체였다. 박사장은 '사람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꿈이 없기 때문이고, 기업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비전과 기업문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부정적인 생각은 애초에 뿌리에서부터 잘라내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1998년 취임 직후 처음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국내 시장이 포화상태라 더 이상 성장이 힘들다"는 해상보험부장의 말에 박 사장은 "현실과 타협하려 하지 말고 부서 문 닫을 준비하라"고 단호하게 지시했다. 당황한 직원들은 눈에 불을 켜고 해외무대로 뛰었고 코리안리는 현재 세계 선박보험과 항공보험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고 맹위를 떨치고 있다. 발로 뛴 결과가 실적으로 드러나면서부터 '안된다'고 엄살부리는 직원이 차츰 줄어들었다. 2002년에는 회사의 이름과 CI를 바꾸는 변신을 시도했다. 30여년 전에 민영화돼 정부 지분이 전혀 없는데도 외부인들이 '대한재보험'이라는 명칭에서 정부투자기관 성격을 연상하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고정관념 불식하고 국제적인 기업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코리안리'로 거듭나게 한 것이다. 박 사장은 영업기반을 다지기 위해 신상품 개발과 신규영역 개척, 해외시장 개척이라는 3대 영업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신상품을 개발해 원보험사에 제공하면 재보험 물량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전략 아래 임원배상책임보험, 인터넷보험, 환경관련배상책임보험, 금융기관종합보험, 치명적 질병보험, 장기간병보험 등 히트상품을 연이어 내놓았다. 또 재보험의 사각지대에 있던 농협, 수협, 교원공제회, 새마을금고 등 공제기관을 재보험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특히 국내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해외영업을 적극 추진해 1998년에 전체 4%에 불과하던 전체 수재보험료 대비 해외영업 비중을 지난해 19%까지 끌어올렸다. 이는 정부의 보호 아래 영업하던 코리안리가 180도 변신에 성공했음을 대변하는 성과였다. 국내외 영업의 성과는 당기순이익으로 드러났다. 1999년 이후 12년간 당기순이익 누계는 7,052억원으로 이전 36년(1963~1998)간 누계 827억원의 8.5배에 달했다. 게다가 지난해에는 사상 최초로 연간 당기순이익 1,000억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He is ▦1944년 경기 화성 ▦1971년 연세대 법과대 ▦1988년 미국 밴더빌트대 경영학 석사 ▦1973년 행정고시 14회(재경) ▦1989~94년 재무부 결산관리ㆍ외자관리ㆍ재정융자과장 ▦1997년 통계청 통계조사국장, 재경원 국세심판소 상임 심판관 ▦1997년 재경부 공보관 ▦1998년 코리안리 사장
야외면접 통해 관습에 젖은 인물 변화 시켜
● 朴사장의 야성경영 박종원 코리안리 사장은 '야성(野性)경영의 전도사'로 불린다. 유복하게 자란 명문 법대생이 베트남전이 한창일 때 해병대에 자원입대하고, 행정고시를 거쳐 관료로서 성공가도를 달리다 돌연 도산 위기의 회사에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해 세계 10대 기업으로 만든 이끈 배경에는 그의 '야성 DNA'가 자리잡고 있다. 박 사장은 지난해 발간한 자신의 자전적 경영서적 '야성으로 승부하라'에서 야성이란 '거칠고 무례하고 사나운 야만과는 다른, 창의력을 가지고 변화에 대응하여 살아나는 힘'이라고 밝혔다. 그는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의 사자를 예로 들어 상황에 맞게 노력하는 게 야성이라고 강조했다. 사자들은 건기에 초식동물들이 자취를 감추면 살아남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 거들떠보지도 않던 멧돼지를 쫓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하마를 공격한다. 심지어는 체면 불구하고 들쥐를 잡거나 썩은 고기를 노략질하기도 한다. 살아남기 위한 노력과 변화를 야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박 사장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환경에 길들여져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사는, 변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는 겉보기엔 완벽하지만 기존 관습에 길들여진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 신입사원 채용전형에서도 야외면접을 최초로 도입했다. 지원자의 내면까지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산행과 축구시합, 식사예절 등 하루 종일 꼼꼼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코리안리의 모든 임직원은 지난 2004년부터 백두대간 종주에 나서고 있다. 매년 2박3일간 40㎞ 이상의 산행으로 팀워크와 정신력, 체력을 키우자는 취지이다. 처음에는 반발도 많았지만 박 사장이 솔선수범한 끝에 2009년에는 지리산~설악산 구간을 완주했다. 박 사장은 "백두대간 종주에서 야성의 기업문화가 완성되고 있음을 예감했다"고 강조한다. 그의 야성경영은 코리안리의 높은 경영성과와 국내 금융업 최초의 5연임 CEO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또 야성경영이 세간에 널리 알려지면서 대학교, 기업체, 정부기관, 학계 등 각계에서 강연 초청이 줄을 잇고 있다. 강연 때마다 그는 '꿈을 가져라. 그 꿈을 위해 도전과 모험을 하라. 아무리 어려움이 있더라도 범사에 감사하고 일을 즐겨라'라고 당부했다. 이를 통해 야성을 회복하라는 메시지였다. 박 사장의 인재상은 '지덕체(智德體)'가 아닌 '체덕지(體德智)'로 요약된다. 지식과 전문성은 기본이고, 인성과 체력이 더욱 중요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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