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정책금융공사와의 통합을 앞두고 있던 산업은행은 보스턴컨설팅그룹에 자문을 했다. 민영화라는 밑그림이 5년 만에 어그러지면서 정책 방향을 잡기 쉽지 않았던 탓이다. 당시 보스턴컨설팅그룹의 자문 결과는 '공공성과 상업성을 조화시키라는 것"이었다. 사실상 두 마리 토끼를 잡으라는 주문이었다.
통합산업은행이 10일 출범 100일을 맞았다. 산업은행은 이 두 마리 토끼를 잘 쫓아가고 있을까. 답은 '아니다'에 가깝다. 오히려 정책금융기관으로서 정체성을 찾지 못한 채 정책금융공사와의 통합으로 한층 비대해진 조직 때문에 고민이 깊어가는 모습이다.
◇최대 고민은 시장마찰=최근 산업은행의 가장 큰 고충은 바로 시중은행과의 업무 중복을 일컫는 이른바 '시장마찰'이다. 실제 산업은행은 다이렉트 예금 등 개인예금은 사실상 손을 놓은 채 제대로 된 영업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다소 높은 금리의 예금에 대해 감사원까지 시비를 거는 등 눈총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산업은행의 강점인 투자금융(IB) 부문도 올 초 국민은행 컨소시엄에 밀려 인천공항철도 운영 사업 입찰 경쟁에서 밀려나는 등 예전만 못하다.
자금 조달의 핵심창구인 산업금융채권의 경쟁력 저하도 시름을 깊게 하고 있다. 현재 산금채 금리는 1년짜리 1.71%, 3년짜리 1.79%, 5년짜리 1.92%로 시중은행 정기예금 금리와 별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시중은행은 이자를 많이 주지 않아도 굴릴 수 있는 수시입출금 통장 등의 저원가예금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산업은행보다 오히려 조달 여건이 낫다. 산금채를 통한 금리 우위로 기업 대출 시장을 쥐락펴락했던 시절과는 확실히 달라진 셈이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 산업은행은 지난해 산금채를 통해 2013년보다 8조원 늘어난 41조5,104억원을 조달했다. 반면 예수금을 통한 조달 규모는 1조원이 줄어든 31조8,798억원에 그쳤다. 개인금융 부문을 축소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입장이지만 자금 조달 포트폴리오가 한층 단순해졌다는 점에서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금리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대기업을 상대로 대출영업을 하는 산업은행 기업금융실의 고충도 가중되고 있다.
인력 과잉과 업무 중복에 대한 우려도 여전하다. 산업은행은 지난 2010년 말 2,300명 수준이던 직원이 2013년에는 2,891명, 정책금융공사와 통합한 지난해 말에는 3,302명으로 4년 사이에 1,000여명이 증가했다. 금융당국 승인 없이는 구조조정이 사실상 불가능한 산업은행으로서는 두고두고 부담이 될 부분이다.
정책금융공사의 기능을 이관한 간접금융부문과 올해 신설한 창조기술금융부문의 경우 업무 중복에 대한 우려도 있다. 산업은행이 최대 주주로 있는 KDB대우증권·KDB생명·KDB자산운용·KDB인프라 등의 매각 이슈도 감감무소식이다. 이들 중 대우증권을 제외한 나머지 업체 대표가 모두 산업은행 임원 출신이라는 점에서 임직원의 자리 보전용으로 매각을 지연시키는 것 아니냐는 시장의 시선이 곱지 않은 형편이다.
◇내부에서도 의견 엇갈려=산업은행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는 관리자급 직원과 상대적으로 젊은 직원 간 의견이 갈리고 있다. 산업은행 고위관계자는 "젊은 직원은 안정성을 택해 입사한 이들이 많아서 그런지 정부의 우산하에 있기를 바라는 반면 나이 든 직원은 정권에 따라 오락가락 행보를 보일 바에는 아예 민간 영역을 강화하자는 의견이 많다"며 "산업은행의 정체성이 혼란을 겪는 것은 어쩌면 세대 갈등이 표출된 것인지 모른다"고 밝혔다.
그렇다고 산업은행 내부의 혼란이 빠른 시일 내에 정리될 것으로 기대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홍기택 회장의 임기가 1년밖에 남지 않은데다 이미 시장에서는 홍 회장의 후임 역시 낙하산 인사일 것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한 민간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은 "산업은행은 시장 참여자들이 꺼려하지만 공공성이 강한 일을 떠맡는 등의 방식으로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며 "지금처럼 현안을 쫓아다니는 데 바빠서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면 역할론에 대한 의문이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