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18대 국회 마지막날까지 자본시장법 개정안 통과가 불발되면서 한국형 IB를 준비해 온 증권사는 물론 CCP 도입 연기에 다른 혼란이 불기피할 전망이다. 특히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과 주요 아시아국가들이 파생상품거래에 대한 청산 및 결제서비스를 시작한 가운데 우리나라는 CCP 도입 지연에 따라 이 시장에서 도태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CCP는 장외파생상품의 거래결제업무를 담당하는 곳으로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인 장외파생상품 거래 위험을 줄이기 위해 지난 2009년 G20 정상회의에서 올해 말까지 설치키로 약속한 사항이다. 한국거래소 역시 자본시장법 개정에 맞춰 올해 7월까지 CCP를 출범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개정안 통과가 무산되면서 CCP도입은 불투명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G20 정상회의에서 올 연말까지 설치키로 합의한 내용인데, 미뤄지면서 국가신용도에도 문제가 될 수 있다”며 “특히 국내 은행이 장외파생상품을 국내서 결제하지 못하면 해외에서 해야 되는데 시장주도권을 싱가포르 등에 완전히 빼앗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싱가포르는 우리나라의 법통과 지연에 반사이익을 노리고 장외파생상품 결제유치를 위해 국가차원에서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은행이나 증권사 등의 파생상품 거래규모는 지난 해 1ㆍ4분기 1경8,872조원으로 전년 동기(1경4,948조원) 대비 26.3%나 증가하는 등 매년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이 가운데 통화나 이자율 스왑등 장외파생상품 거래규모는 3,397조원으로 전년 3,183조원 대비 6.7%(214조원) 증가했다.
이 같은 장외파생상품 결제를 국내에서 하지 못하게 되면 이 시장을 싱가포르 등 CCP시장을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는 다른 경쟁국가에 고스란히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싱가포르가 우리나라의 CCP설치 지연에 따라 결제유치를 위해 전방위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며 “19대 국회에서도 국내 CCP설치가 언제 가능할 지 예측이 어려워 장외파생 결제시장에서 주도권을 잃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한국거래소 옥진호 파생상품연구센터 실장은 “장외파생결제시장을 단기간에 싱가포르 등에 완전히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는 지나칠 수 있지만, CCP 도입지연이 결코 유익하지는 않다”고 지적했다.
‘한국형 골드만삭스’를 꿈꾸던 대형 증권사들의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국내 증권사를대형과 중소형으로 구분해 대형 증권사의 경우 IB업무 등으로 특화하도록 한 자본시장법이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글로벌 시장을 공략해 보려던 대형증권사들의 맥이 풀려 버렸다. 대형증권사 IB본부장은 “자본시장법 국회통과 불발로 정부의 정책추진 신뢰도가 떨어질 것으로 우려되고 있고, 대형과 중소형이 구별되지 않고 60여개 증권사가 좁은 국내 시장을 두고 경쟁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과연 정상적인지 의문”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특히 대형 IB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작년 말까지 서둘러 자기자본을 3조원으로 확충했지만, 법 통과 무산으로 수익확보가 어려워 지면서 회사가치만 하락할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실제 대우증권과 삼성증권, 우리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 현대증권 등은 자본시장법 통과를 전제로 IB업무를 준비하기 위해 작년 말에 최소 4,000억원에서 1조원을 증자했다. 그러나 법 통과 무산으로 늘어난 자본금을 활용할 방안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손미지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자본법 국회 통과 무산은 대형 증권사들이 모처럼 뭔가 해 보려는 데 찬물을 끼얹은 것과 같다”며 “증자한 자본금으로 마땅한 대안투자처를 쉽게 찾지 못하고 있어 대형 증권사들의 자기자본이익률(ROE) 하락은 불가피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국내 대형증권사가 글로벌IB로 도약할 기회를 상실함에 따라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의 IB시장을 미국의 중형IB들에게 고스란히 바치게 됐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유럽계 IB의 회복이 장기화될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에서 중국과 인도, 브라질 IB시장에 우리나라 증권사들이 진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마련됐지만, 법 통과 불발로 미국계 중형IB로 고스란히 넘겨주게 됐다”며 “실제 미국계 중형IB들이 대형IB들이 놓친 시장에 진입하면서 새로운 중흥을 준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19대 국회에서도 자본시장법이 조기 통과될 가능성이 낮다는 점이다. 의원들이 많이 교체된 데다, 법안 제출을 다시 하고 내부 절차를 거쳐 실제 시행되는 데만 해도 최소 1년 이상은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 밖에도 대체거래소(ATS) 도입 지연 등 자본시장 인프라 선진화에도 제동이 걸렸고, 작년 말 도입된 헤지펀드 운용에도 상당한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18대 국회가 제조업과 함께 자본시장법 육성해야 된다고 거창하게 떠들었지만, 정작 대형증권사들의 발목만 잡는 형국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는 오명만 뒤집어 쓰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