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가 막힌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냉정히 생각해도 화나는 일이다. 한편으론 미스테리다.13년 전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악령을 연상케 하는 「CIH 바이러스 대란」을 접하며 드는 느낌이다.
남들도 다 같은 정도로 당한 피해라면 특별할 리 없다. 그러나 이건 다르다. 미국·싱가포르에선 기껏 수백, 수천대 밖에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CIH 바이러스가 큰 뉴스거리도 안될 만큼 피해가 경미했다.
하지만 한국에선 「4.26 대란」으로 무려 100만대 정도의 PC가 깡통이 돼버렸다. 보급된 PC가 모두 800만대. 그중 100만대가 일시에 고장난 사태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음울한 상징성을 던져준다.
도무지 상식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정교한 수수께끼 같기도 하다. 그래서 「4.26 대란」은 비합리적, 반문명적인 구석도 안고 있다.
아무튼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에이즈를 퍼뜨리는 HIV바이러스를 대하듯 컴퓨터 바이러스도 앞으로는 심각하게 바라 볼 일이다. 사후 조치는 신속해야 한다. 수십만원의 복구 비용은 이용자가 부담할 수 밖에 없지만. 또 피해 규모와 범위가 워낙 큰 만큼 바이러스 확산 경로와 유포 경위를 정밀히 추적, 조사하는 활동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뿐이라면 일과성 처리 방식과 다를게 없다. 지금까지 대형사고에 대처할 때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러면 뭔가 미진한게 남는다.
PC통신 하이텔에 의견을 띄운 한 네티즌의 거친 주장을 들어보자. 『자신의 PC가 CIH 바이러스에 걸린 공무원은 전부 퇴출시켜야 한다. 언론이 그만큼 알렸고 백신도 무료로 받을 수 있었다. 도대체 왜 안했는지 모르겠다. 세금으로 일하는 공무원이 그렇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ID:ILOVEALL)
그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정곡을 찌르고 있다. 800만대의 PC중 100만대가 한꺼번에 깡통화된 것은 「대란(大亂)」으로 규정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는다. 지극히 운이 없는 몇 사람만 당한 해프닝이 아니다. 「정보사회」에서 「정보시민의 안녕」이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 대홍수로 수 십만 채의 가옥이 유실된 사태와 본질적으로 다른게 무엇인가.
문제는 사회적 재난으로 귀결된 「CIH 사태」에 대해 정부가 아무런 사전 대응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구나 「예고」된 바이러스였다. 재난에 대한 정부의 무대응은 심각한 직무 유기, 포기다. 국민이 받을 수 있는 위협 요인을 사진에 인지, 예측하고 대응 시스템을 갖추는 일을 도대체 정부 말고 누가 해야 하겠는가.
정부는 수해에 대비, 한강 등 4대강에 홍수통제관리소를 설치해 놓고 있다. 댐마다 수위가 일정 수준으로 오르면 자동으로 홍수 경보가 내려진다. 수해가 발생하면 즉각 재해대책본부를 가동한다. 건설업체가 갖고 있는 장비·인력도 긴급히 동원한다. 이는 기본적인 재난 대응시스템이다.
그러나 정보화 주무부처인 정보통신부에는 「정보화 재난」에 대한 대응 시스템은 커녕, 재난에 대한 「감각」조차 결여돼 있음이 이번 사태로 여실히 드러났다. 20여대의 PC가 CIH 바이러스 직격탄을 맞아 장관 보고자료가 날아가 버리기도 했다. 이만저만한 망신이 아니다.
『Y2K가 준동하기 전에 CIH가 날뛰어 천만다행』이라는 역설이 성립해 또 한번 기가 막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