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끝 불볕 더위가 시작된 지난 수요일, 졸업 후 25년 만에 친하게 지냈던 고등학교 동창을 광화문에서 만났다.
4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은 만남이었지만 그의 얼굴은 전혀 낯설지 않았고 서먹서먹함 또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그의 머리에 드문드문 하얗게 내려앉은 세월의 흔적과 눈가의 주름은 80,90년대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우리들 삶의 무게가 어떠했는지 뒤돌아보기에 충분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미국 유수IT업체 한국지사의 이사로 근무하는 그는 자리를 옮겨 앉기가 무섭게 그간의 안부는 제쳐둔 채 소주잔을 건네며 하소연 하듯 말을 쏟아냈다.
“어째 살기가 외환위기 때보다 더 힘든 것 같다”로 시작된 그의 푸념은 “도대체 정부는 무얼 하고 있는지 또 우리사회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급기야 참여정부에 대한 실망과 비난으로 이어졌다.
외환위기 때는 그래도 이 고비만 넘기면 다시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장롱 속에 깊숙이 숨겨뒀던 금반지를 흔쾌히 내다 팔았지만 이제는 팔 금붙이도 없을 뿐더러 원칙도 없이 허둥대기만 하는 정부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러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다.
조흥은행 파업 사태 때는 주 전산실에 반 감금상태로 갇혀 있으면서 갈등과 혼란의 시대에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데서 오는 자책감에 눈물까지 흘렸다고 했다.
386세대가 대체 뭐길래 마치 역사의 주인공인양 떠들어대는 꼴도 보기 싫고 함량 미달의 인물들이 줄 잘 선 덕분에 완장 하나씩 꿰차고 구태를 답습하는 모습은 역겹기까지 하다고 했다.
전자공학이 전공인 그는 프린터 소스 하나 없을 만큼 불모지였던 국내 정보통신산업의 발전을 위해 묵묵히 10수년 동안 기술개발에만 매달려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 세월이 바보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갈수록 사는 게 재미없다는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불거져 나오고 있다.
그래도 우리사회의 중상류층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그가 이 정도라면 하루하루를 힘겹게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서민들이야 오죽 하겠느냐는 생각이다.
고공에서는 수십억 수백억원의 검은 돈이 고위층의 목을 옭아매며 다음 제물을 찾아 날아다니지만 밑바닥에서는 단돈 몇 만원이 없어 죽기 싫다고 발버둥치는 자식을 어미가 고층에서 밀어 죽이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개발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우리사회의 빈곤층은 전국민의 12%인 455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탈출구를 잃은 빈곤층에 대한 실제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을 경우 자살은 물론 납치ㆍ강도 등 각종 범죄가 증가, 사회적 혼란이 커질 것으로 경고하고 있다.
280만여개에 달하는 중소기업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기협중앙회의 최근 조사에 의하면 중소제조업체의 평균 가동률은 68.3%로 지난 99년 3월 이후 최저치로 떨어졌으며 중소기업 CEO들의 86%가 현재의 경기상황을 위기 국면이라고 보는 등 중소기업의 경영상태는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수치로 나타난 지표보다 체감경기는 훨씬 더 심각하다.
그러나 밑바닥에서는 이처럼 다들 죽겠다고 난리들인데 이들의 고통을 덜기 위한 정부의 노력은 커녕 쓸데없는 데다 힘을 쓰고 있는 듯해 안타깝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말로는 경제를 살리겠다면서도 정작 신경은 엉뚱한데다 쓰고 있는 모습이다. 아무리 개혁을 외치더라도 기본적으로 경제를 망가뜨린 대통령은 성공한 대통령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골짜기에서는 큰 것이 보이지만 산마루에서는 작은 것 밖에 보이지 않는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기를 버릇하면 낮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피부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고소(高所)에 익숙해지면 그곳에만 머물고 싶기 마련이다.
우뚝 높이 솟은 곳을 일컫는 농단(壟斷)이란 말이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권력이나 이익의 독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뀐 과정을 보면 고소가 가지는 위험성을 잘 알 수 있다.
낡은 정치 청산과 혁신적 변화도 중요하지만 서민들이야 일자리 잃지 않고 먹고 사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대통령을 걱정하는 일이 많아졌다. 더 이상 국민이 대통령을 걱정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제는 자세를 낮춰 밑바닥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노무현 대통령께 간곡히 부탁컨데 부디 `낮은 데로 임하소서`
<박민수 (성장기업부장) minsoo@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