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에서 일해보니 조연의 설움을 이해하겠더군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지 아이 조'의 제작진이 28일 내한했을 때 공항에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은 시에나 밀러의 팬도, 채닝 테이텀의 팬도 아니었다. 일본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이병헌의 팬들은 공항에서 호텔까지 따라붙었다. 이 모습을 본 감독과 제작진은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이 다니는 것 같다"며 놀라워했다.
이병헌은 아시아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존재지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조연이었다. 영화사 측에서 배우에게 제공하는 트레일러(배우가 촬영을 준비하는 장소)도 주연과 달랐고 심지어 분장팀도 주연을 맡는 팀과 달랐다. 새벽6시부터 촬영준비를 했는데 오후4시가 돼서 촬영분량이 없다고 통보 받은 적도 있었다. 게다가 이병헌이 맡은 '스톰 쉐도우'는 원래 복면을 벗지 않는 캐릭터다. 예고편에서도 이병헌의 얼굴이 잘 드러나지 않아 국내 팬들 사이에 이병헌의 노출분량을 두고 말이 많았다.
30일 경복궁 근처 한 카페에서 만난 이병헌은 이에 대해 초연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내심 이런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그는 "이번 기회로 조연과 단역들의 심정도 이해하게 됐다"며 "이런 상황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기보다 즐겁게 촬영에 임했다"고 웃어 넘겼다.
영화 속 이병헌의 비중은 국내 팬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크다. 이병헌은 "만화가 원작이다 보니 원작에서는 복면을 벗지 않는 '스톰 쉐도우'의 얼굴을 드러내는 데 대해 감독과 투자자 간에 이견이 있었다"며"그래서 초반부터 감독과 프로듀서에게 반 이상은 복면을 벗고 나왔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해뒀다"고 말했다.
쉴틈 없이 쏟아지는 액션 사이에서 이병헌 특유의 '눈빛연기'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병헌은 "연기 면에서는 점수를 주고 싶지 않다"며 "내가 깊이 있는 연기를 하면 할수록 영화에는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복잡한 감정연기는 다 삭제되고 단순한 느낌의 악당만 남았다"고 분석했다. 그는 "다만 1960년대부터 유명했던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고 신기했다"며 "블루스크린 앞에서 찍을 때는 몰랐는데 완성작을 보니 대단하더라"라고 자평했다.
이병헌은 "아직 확정이 되지는 않았지만 '지 아이 조' 속편을 한다면 당분간 다른 할리우드 영화를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며 "또 연기할 기회가 생긴다면 '제리 맥과이어'나 '바닐라 스카이' 같은 영화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할리우드 진출을 위해 어떤 준비를 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건방져 보일지 모르지만 영어 외에 달리 준비한 것은 없었다"며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대신 보여주는 게 우리 직업이니 연기공부를 한다는 것은 모순이 있다. 그냥 갇혀 있지 않고, 많이 돌아다니고, 싸움도 해보고, 사랑도 해보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보는 게 연기준비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