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월14일] 매튜 모리


보험업자들이 증기선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바람을 등지고 항해하는 범선 시대에는 발생하지 않았던 충돌사고가 자체 동력으로 어디든 갈 수 있는 증기선 시대가 열리며 빈발한 탓이다. 늘어나는 보험금에 울상 짓던 보험사들의 고민은 한 순간에 날라갔다. 이 사람 덕분이다. 매튜 모리(Matthew Maury). 1806년 1월14일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난 소년 모리의 꿈은 해군 제독. 해군사관학교를 나온 뒤 세계각지를 항해했지만 1839년 마차 사고로 다리가 부러졌다. 함정 근무 부적합 판정을 받은 모리 대위는 도서관에 처박혀 해류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독립전쟁 당시 대륙해군의 낡은 자료에서 상선에게 넘겨받는 최신 자료를 모아 대서양의 풍향 풍속과 해류의 흐름을 담은 항적도를 1847년 펴냈다. 모리의 지도에 의존해 뉴욕-브라질 항로를 1개월이나 단축시킨 선장도 있었다. 유명해진 모리는 1853년 브뤼셀에서 열린 최초의 국제해양회의에 미국 대표로 참가해 증기선과 범선이 다닐 뱃길을 처음으로 제시, 충돌사고를 줄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국제수로기구(IHO)와 세계기상기구(WMO)도 이 회의의 후신이다. 최초의 근대적 해양학 교과서인 ‘바다의 자연, 지리학’을 발간(1855년)하고 대서양 해저케이블의 가설도 제의했던 모리는 남북전쟁이 터지자 연방 해군 사령관 자리를 버리고 남부해군을 이끌었다. 종전후 사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1872년 강연 여행 도중 숨졌다. 모리의 해도는 풍향과 해류의 움직임에서 해저지형과 고래 분포도, 기상상태까지 망라한 명작으로 유명하다. 마차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모리는 평범한 군인에 그쳤는지도 모른다. 근대해양학도 불구의 몸에 좌절하지 않고 자료실의 곰팡이 냄새와 싸운 모리의 용기와 집념에서 싹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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