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채권시장안정기금은 성공해도 문제고 실패해도 문제다.채권안정기금의 성공은 우리 금융시장이 외부의 도움없이 자생적으로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고 정부개입이라는 타율에 의해 살아났음을 공식화하는 것과 같다.
만약 채권기금이 실패한다면 20조원이나 되는 거대한 부실 덩어리를 새롭게 떠안게 될 것이다. 두 가지 결과 중 어느쪽이 더 큰 실패인지는 쉽게 말할 수 없다.
어쩌면 채권기금의 성공이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시장에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 시장에 위기가 닥쳐오면 제2, 제3의 기금이 등장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열어놨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시장의 자생력은 영원히 길러지지 않을 것이다.
채권기금의 돈은 어디서 새롭게 나온 것이 아니다. 은행과 보험에 있던 돈을 기금으로 묶은 것에 불과하다.
대우사태 후 투신권에서 쏟아지는 채권을 그 누구도 매수하려 들지 않았다. 금융기관들은 돈이 있는데도 정부만 바라볼 뿐 시장을 살리겠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마침내 정부가 나서서 기금을 강제로 조성하고 그 기금으로 채권을 사자 금융기관들은 따라서 채권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시장은 시장 참가자들의 이해라고 하는 세련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작동된다. 그런데 우리 금융시장은 정부라고 하는 우왁스런 「보이는 손」에 의해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일부 채권전문가들은 이번 기회가 채권시장을 시장답게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고 말한다. 아무 생각없이 매입한 채권이 부도가 나면 어떤 대가를 받게 되는지 모든 시장 참가자들이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는 것이다.
정부는 채권기금이라는 진통제로 위기를 넘기려 하고 있다. 금융시장은 이미 정부가 내주는 진통제에 길들여져 버렸다.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약물에 의존하면 약물중독증에 걸리고 결국 폐인이 된다.
정부는 금융시장을 약물중독증 환자로 만드는 의사 노릇을 언제까지나 계속 할 생각인가.
증권부 정명수 기자ILIGHT3@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