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기로 발견된 옛 안기부 불법도청 테이프의 조사와 공개를 둘러싼 정치권의 주판알 굴리기가 한창이다. 명분은 살리되 행여 손해 볼 일은 피해가겠다는 게 셈법의 핵심이다. 겉포장이 요란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우리당-공개, 한나라당-비공개로 요약된다.
열린우리당이 꺼낸 카드는 '제3기구 검증론'. 테이프 공개 여부와 기준, 처리 방향을 민간 검증기구에 맡기자는 것이다. 테이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국가정보원과 검찰ㆍ정치권은 배제하되 중립성이 보장된 제3자에게 넘기자는 주장이다.
현행법상 테이프 내용의 공개는 불법이지만 국민적 의혹 해소차원에서 덮어둘 수 없다는 게 명분이다. 두 가지 계산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공개시 파편을 맞아도 한나라당에 비해서는 피해가 작을 것이라는 자신감과 ▦제3의 검증기구를 통한다면 테이프 공개를 둘러싼 각종 '음모론'을 잠재우며 여당으로서의 부담을 덜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공개에 대한 입장은 알쏭달쏭해 보인다. 박근혜 대표는 1일 기자회견에서 “전부 공개돼도 상관이 없다는 입장”이라면서도 “다만 공개하자는 것은 불법적인 얘기가 되니 그렇게 (공개하자고) 얘기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할 수 있지만 공개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도청 테이프의 공개를 원하는 국민정서를 감안하면서도 공개불가라는 원칙을 밝힌 셈이다. ‘할 수 있다면서 왜 안 하냐’는 역공이 예상된다. 여당이 제3의 독립 검증기구에 의한 테이프 공개를 들고 나올 때 한나라당은 현행법을 내세워 방어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여야간 격돌이 예고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