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9월18일] <1193> 파쇼다 사건


1898년 가을, 이집트령 수단 남부 파쇼다(Fashoda).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맞닥뜨렸다. 파쇼다를 선점한 나라는 프랑스. 마르샹 소령이 지휘하는 흑인부대 150여명이 가봉을 출발한 지 2년간 3,200㎞의 여정 끝에 1898년 7월 파쇼다에 도달, 진지를 세웠다. 프랑스군 소식을 들은 영국도 키치너 소장이 이끄는 영국-이집트 혼성군을 편성해 나일강을 거슬러 남하했다. 9월18일 파쇼다 도착. 키치너는 마르샹에게 수단 지역은 영국에 우선권이 있다며 프랑스 국기를 내리고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한 마르샹은 긴급구원을 요청하는 전령을 본국에 보냈다. 양군의 대치 소식은 영국과 프랑스를 들끓게 만들었다. 프랑스에서는 ‘전쟁불사론’까지 일었다. 위기는 갑작스레 대화 분위기로 바뀌었다. 프랑스는 11월 초 파쇼다 철수라는 단안을 내렸다. 나일강을 경계로 이집트는 영국이, 모로코는 프랑스가 각각 차지한다는 이면합의가 있었지만 프랑스로서는 양보임이 분명했다. 프랑스는 왜 백년전쟁 이래 북미와 인도ㆍ아프리카에서 피나는 경쟁을 벌였던 영국에 양보했을까.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마침 프랑스에서 유대계 포병장교 드레퓌스의 독일 간첩 혐의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50억프랑의 배상금을 물었던 보불전쟁(1871년)의 패배를 잊지 말자’는 일부 언론의 부추김으로 ‘반영(反英)’ 기운은 ‘반독(反獨)’ 분위기로 바뀌었다. 대독일 공동전선을 위해 식민팽창을 자제한 셈이다. 제국주의 식민경쟁의 타협점인 파쇼다 사건은 또 다른 경쟁을 잉태하며 인류의 피를 불렀다. 영ㆍ프 동맹과 독일의 대립구도는 유럽연합(EU)이 영국의 불참 속에 독일과 프랑스의 주도로 설립될 때까지 생명을 유지하며 1ㆍ2차 대전에서만 수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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