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발언대/3월 31일] 백남준, 모국이 그를 알아봐야 할 때

오랜 친구가 백남준아트센터에 찾아와 전시를 둘러보다 점심을 같이했다. 친구는 그간 쌓인 얘기들은 제쳐둔 채 백남준에 대해 캐물었다. 저런 특이한 전시를 만들게 한 장본인, 요란한 음악과 알쏭달쏭한 말, 퍼포먼스, 비디오와 조각에까지 이른 백남준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새삼 궁금하다'고 했다. 그 질문은 내 뒤통수를 가볍게 치는 것이기도 했다. 지난 2007년 용인에 백남준아트센터가 개관한 이래 기획전과 세미나의 바쁜 일정 속에 정작 백남준이 누군지 알아가는 호사를 우리만 누린 것은 아니었을까. 백남준은 지금으로 치면 재벌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1930년대 자기 집 안방에 좌익ㆍ우익ㆍ독립군 할 것 없이 들락거리는 것을 무슨 놀이처럼 보며 자랐다고 했다. 어린 백남준은 누이가 치던 피아노에 심취했고 동경대 상경대에 입학했지만 아버지 몰래 미학을 공부했다. 작곡가라는 청운의 꿈을 품고 독일에 갔지만 운명은 그를 존 케이지와의 만남으로, 서독 방송국의 전자음악으로, 플럭서스(Fluxusㆍ전위적 미술운동)로, 그리고 텔레비전과 신기술로 몰고 갔다.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연 그의 첫 개인전은 기념비적 전시였다. 전시장 문 앞에는 백남준이 직접 자른 소머리가 피를 뚝뚝 흘리며 걸렸고 지하에는 마네킹 조각이 널려 있었으며 피아노에는 브래지어와 도끼를 꽂아놓았다. 이렇게 시작된 백남준의 다원적 예술은 결국 여러 글로, 비디오 아트로, 인공위성 시리즈로, 전 지구에 커다란 선물을 선사했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국립 현대미술관(MUMOK)은 지난해 이를 재조명하는 대형 전시를 열었다. 올해에는 영국의 테이트 리버풀 미술관과 뒤셀도르프 미술관에서 대대적인 백남준 회고전이 열린다. 이제는 타국의 그들이 알아낸 것을, 같은 감성과 역사를 가진 모국의 우리가 깨달아야 할 때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