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성공리에 끝났다. 테러ㆍ광역전염병 등 인간안보 문제가 논의되었고 도하개발어젠다(DDA)의 타결을 촉구하는 특별성명도 발표됐다.
비록 APEC의 가장 중요한 존재 목적이었던 경제협력이 소홀히 다뤄졌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21개국의 정상들이 모이는 회의를 그것도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성공적으로 개최한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APEC의 성공을 빨리 잊는 것이 좋다. 말레이시아에서 개최될 아세안+3 정상회의와 동아시아정상회의를 며칠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美·中·日 파워게임속 입지 불안
노 대통령은 두개의 정상회의에 참석해야 하고 아세안+1(한국) 회의를 열어야 하며 예년 같으면 한ㆍ중ㆍ일 3국 정상회의에도 참석해야 한다. 모두가 장차 동아시아의 미래 질서와 한국의 미래에 APEC보다는 더욱 중요한 영향력을 줄 회의들이다.
동아시아 외환위기 와중에서 시작된 아세안+3 정상회의는 아세안이 한국ㆍ중국ㆍ일본의 정상을 초청해 공동 관심사를 논의하는 연례회의다. 아세안의 9배에 이르는 경제력을 가진 동북아 3국이 단순히 아세안의 초청 손님에 머문다면 진정한 동아시아 협력 방안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동아시아 협력의 심화를 위해 아세안+3 체제가 13개국이 동등하게 참여하도록 발전적인 전환이 이뤄져야 하는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에 따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동아시아정상회의(EAS) 창설을 제안했다.
그러나 올해 처음 개최되는 동아시아정상회의의 형태는 우리의 기대를 벗어난 것이다. 동아시아 통합 과정에서 중국의 주도권을 우려한 일본과 미국은 인도ㆍ호주ㆍ뉴질랜드 등 비동아시아 3국을 정상회의의 멤버로 참석하도록 한 것이다.
당초 중국을 ‘선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보지 않은 아세안도 비동아시아 3국의 참석에 동의했지만 이제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미국ㆍ러시아ㆍ파키스탄 등이 관심을 갖고 있으니 또 다른 APEC이 등장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최근 상황을 보면 아세안과 중국은 기형적인 동아시아정상회의를 실속 없는 회의체로 격하시키고 기존의 아세안+3 체제를 다시 동아시아의 협력 모태로 삼을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여기에 일본과 미국은 동조하지 않고 동아시아정상회의가 동아시아 협력의 주체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과 일본의 갈등은 역사 왜곡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라는 핑계로 급기야 아세안+3 회의를 이용해 매년 열리던 한ㆍ중ㆍ일 3국 정상회의를 취소시킬 모양이다.
이처럼 우리의 아이디어나 마찬가지였던 동아시아정상회의는 동북아 균형을 중시했던 참여정부의 무시 속에서 전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소외된 우리의 입지도 덩달아 취약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다자 협력을 위해서는 한계를 갖고 있는 APEC보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 의존해야 하고 동시에 지역 협력으로서 동아시아와 결속을 강화해야 한다. 동아시아 내에 시장이 있고 그 시장은 더욱 확대될 것이기 때문이다.
'방관-중재' 선택의 기로에
지금 우리는 일본ㆍ미국에 동조해 또 다른 APEC의 등장에 기여할 것인지, 아니면 중국과 아세안처럼 아세안+3 체제로 잠시나마 돌아가야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외형적으로는 야스쿠니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아시아 주도국의 교체 과정에서 나타나는 중국과 일본의 갈등을 구경만 할 것인지, 어떻게 중국과 일본의 중재 역할을 하면서 진정한 동북아의 균형자가 될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노 대통령은 부산 APEC의 성공을 잠시 잊어버리고 동북아, 나아가 동아시아 통합과 협력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가다듬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