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흘리개 시절 필자는 갖가지 색으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뜻도 모르는 문구를 적는 것으로 카드 만들기를 해치우곤 했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은 뜬금없이 '왜 그렇게 무성의하게 카드를 만들었을까' 하고 자문도 한다. 크리스마스가 무엇인지 몰랐고 딱히 카드를 건넬 이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 애써 핑계를 찾는다.
수십년이 지나 필자는 해마다 성대하게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교회의 일꾼으로 일하고 있다. 여전히 필자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철없던 그때나 지금이나 크리스마스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고 카드를 보낼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다.
평범한 이들에 구원 주는 성탄
지금도 크리스마스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한 이유는 '그렇게 온 세상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기념하는, 거룩하게 태어난 그 아기가 어찌하여 무슨 죄를 범했기에 십자가에 처형됐을까'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으니 그 아기는 하늘과 땅을 하나로 잇는 길을 연 셈인데 사람들은 왜 십자가를 하늘 높이 세우고 그곳에 그를 매달았을까' '하늘과 땅을 잇는 길을 폐쇄하려는 것이었을까' '혹시 이 사람처럼 하늘과 땅을 이으려는 불경한 짓(?)을 하면 이 꼴을 당한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누군가 으름장을 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상념들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성탄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말인데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사명(구원과 해방)을 받아 기름을 얹어 성별(聖別)해 파견된 이를 말하고 '미사'는 '파견'이라는 의미의 라틴어인데 교회는 '희생ㆍ나눔ㆍ친교의 제사'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하느님의 사명은 요약하면 '구원과 해방'이다. 이는 비구원과 억압의 상태를 전제한다. 크리스마스는 비구원과 억압의 상태에 놓인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고 해방하기 위해 파견된(성탄) 예수의 희생(십자가 죽음)을 기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원과 해방이 마음의 문제이자 개인의 문제이며 사후의 문제이기만 한 것인가. 많은 사람의 기대와 달리 신구약성경과 교회는 구원과 해방이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이며 공동체의 문제이고 역사의 문제라고 가르친다. 예수가 관심과 애정을 갖고 돌본 이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었는지, 거꾸로 끈질기게 예수를 죽이려 애쓰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었는지를 보라. 오늘날의 표현으로 요약하면 예수가 구원과 해방의 길을 열어준 이들은 사회적 약자였고 예수를 죽음의 길로 내몬 사람들은 당대의 힘 있는 지도자들이었다.
우리는 예수의 성탄을 노래하고 카드와 선물을 주고받으며 거리를 빛으로 장식하지만 그 모든 것은 반드시 이 땅의 평범한 사람에게 구원과 해방을 알리는 기쁜 소식이어야 한다. 예수가 목숨 바쳐 돌보고 섬긴 사람들, 예수가 당신의 이웃으로 또 벗으로 삼은 이들, 즉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외면한 채 부르는 성탄 노래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조롱하는 것에 불과하다. 아무리 화려한 성탄 장식이라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겉옷을 놓고 벌인 제비 뽑기에 불과하다. 아무리 비싼 성탄 카드와 선물이라도 고통에 신음하며 목말라하는 예수에게 건넨 신 포도주에 불과하다.
나를 태워 이웃을 따뜻하게
성탄을 맞이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와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고 땀을 흘려야겠다. 내 삶이 누군가에게 보내는 크리스마스 카드가 돼야겠다. 겨울 추위를 이기려면 따뜻함이 필요하고 마땅히 땔감을 태워야 한다. 이웃과 세상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남을 태워 내가 따뜻하게 지내려는 세태에서 나를 태워 남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어리석지만 그래야 마침내 '세상의 크리스마스'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