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스무살 비와 연꽃의 향기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스무 살 해의 이 무렵이었다. 대학진학 실패로 진로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나는 허름한 추리닝 바지에 반팔 티셔츠 하나를 걸치고 동네 뒷산에 위치한 조그마한 산사를 찾아갔다. 장마 초입에 접어들어 내리던 그 날 비는 어찌 그리 추적추적 내리던지. 그 무렵 나는 세상에 부딪혀 산산이 깨어지고 바스라지는 아픔을 느끼고 싶었다. 치밀어 오른 청춘의 오기에 에워싸여 세상에 거칠게 대들고 반항하고 싶었다. 때로 주체할 수 없이 타오르는 열정이 현실에 억눌린 내 청춘에 절망하고 운명에 방황하는 나를 붙잡아 나로 하여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고 싶었다. 전신을 적시며 헉헉거리며 뛰어보고 구멍 뚫린 하늘에 대고 미친 듯이 고래고래 소리도 질러가면서 나는 오불꼬불 비탈진 길을 올라갔다. 호젓한 오르막길 구비구비에 또아리를 튼 들풀들, 희뿌연 소나무들, 낙비에 맥 못 추고 고개 떨군 이름 모를 들꽃조차도 비 소리와 뒤섞여 내 청춘의 고뇌를 조롱이나 하듯, 차라리 몸부림을 치며 웃어댔다. 그날 내 몸 속에는 비와 숲의 조롱이 절절히 스며들고 있었다. 숨 가삐 올랐지만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엔 나는 등골이 오싹할 만큼 파르르 추위에 떨고 있었다. 빗줄기에 흐려진 탓인지 절간은 평소 생각보다 더 자그마하게 느껴졌다. 동네에 있는 여느 여염집과 다름없다고 느낄 정도였다. “스님, 계십니까?” 법당 안에서 늙수그레한 스님이 문을 삐끗 열고 나와 내 행색을 힐끗 살피고는 대수롭지 않은 듯 들어오라고 했다. 스님과 나 둘뿐인 세상은 고즈넉했다. 법당 안의 불빛에 몸을 녹이며 우린 이런저런 처연한 얘기를 나누었다. `더럽고 탁한 물속에서도 더러움을 조금도 자신의 꽃이나 잎에는 묻히지 않고 청아하게 피어나는 연꽃의 고결함`을 알게 된 것도 그 때였다. 은은한 연꽃의 향기가 텅 비어 있는 내 가슴속을 가득채우며 맴도는 것 같았다. 그날 난 마음을 비우고 하산할 수 있었다. 산사를 내려오며 온몸으로 느낀 빗줄기가 어찌 그리도 시원하던지. 그 시원함은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내 가슴에 머무르고 있다. 세월의 강을 따라 난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 광역시의원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어 의정단상에 서있다. 원고를 쓰고 있는 오늘 밤도 그날처럼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다.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 여,야로 나뉘고 신,구로 갈라져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 현실을 훌훌 털어버리고 오래 전 그 날처럼 은은한 연꽃의 향기를 찾아 산사를 찾고 싶다. 초여름의 고요하고 적막한 연못에 초연하고 청아하게 피어있는 연꽃의 향기를 다시 느껴보고 싶다. <전갑길(국회의원ㆍ민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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