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7월 26일] <1758> 몬카다 병영 습격


SetSectionName(); [오늘의 경제소사 7월 26일] 몬카다 병영 습격 권홍우 편집위원 ImageView('','GisaImgNum_1','default','260');

1953년 7월26일 새벽 5시15분, 쿠바 동남부 산디에고 드 쿠바. 137명의 반군이 지역 방송국과 병원을 접수했다. 새벽 6시, 기세가 오른 반군은 몬카다 병영에 총격을 퍼부었다. 쿠바 혁명의 시발점인 ' 사건'이 일어난 순간이다. 반군의 기세는 바로 꺾였다. 쿠바에서 두 번째로 큰 육상기지인 몬카다 병영에서 쏟아져나온 1,000명의 바티스타군에 눌려 산으로 도시로 뿔뿔이 흩어졌으나 61명이 사살되고 51명이 잡혔다. 주모자인 27세의 변호사 피델 카스트로도 체포돼 76일간 독방에 갇힌 끝에 비밀 재판에서 15년형을 선고 받은 뒤 유명한 최후진술을 남겼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여론에 힘입어 복역 20개월 만에 풀려난 카스트로는 멕시코로 망명, '7월26일 운동'을 조직해 병사와 무기를 모았다. 아르헨티나 출신 의사 체 게바라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카스트로는 1956년 말 정원 12명짜리 요트 '그란마호'에 83명의 반군을 태우고 쿠바에 상륙, 본격적인 게릴라전에 들어갔다. 전투기와 전차까지 동원한 정부군의 진압으로 병력이 14명으로 줄었으나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반군은 2년 뒤 수도 아바나에 입성, 혁명을 성공시켰다. 미국의 주요 언론마저 초기에는 혁명을 반겼을 만큼 부패했던 독재자 바티스타는 30억달러의 재산을 챙겨 도미니카로 도망쳤다. 외국자본 처리 과정에서 미국과 갈등을 빚은 카스트로의 선택은 공산권 편입. 소련의 집중적인 지원으로 경제개혁에 성공한 쿠바는 턱 밑의 공산정권을 전복하려는 미국의 온갖 시도에도 살아남았다. 소련 해체 이후 경제난에 시달리고 카스트로의 건강도 예전 같지 않지만 쿠바 국민들의 혁명에 대한 자부심만은 여전하다. 쿠바가 경제난을 극복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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