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 별난 기후 덕분에 한껏 멋들어진 단풍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나이 탓만은 아니었을 단풍앓이였다. 사람은 누구나 한두 번쯤 어떤 대상에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싸이가 뮤직비디오 '강남스타일'에서 보여준 노래와 춤도 한동안 나라 안팎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유교 경전 가운데 하나인 예기(禮記)의 악기편에 이런 대목이 있다. "대저 음(音)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이 외부에 감촉돼 움직이는 것이 소리(聲)이다. 소리가 일정한 비율을 가질 때 음(音)이라 하고 음(音)이 모인 것이 악(樂)이라 하며 악(樂)은 반드시 춤과 더불어 행하게 된다."노래와 춤이 우리의 마음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보여준다.
진주검무에 넋 잃고 시를 쓴 정약용
조선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교방(敎坊)춤이 있었다. 각 지방 관찰사의 집무소인 감영(監營)에서는 귀한 손님이 오면 최고의 예기(藝妓)들을 불러 연희를 베풀었다. 교방은 속악(俗樂ㆍ전통음악)과 당악(唐樂) 또는 아악(雅樂ㆍ궁중음악)에 따라 가무(歌舞)를 하는 기녀들을 가르치고 관장하던 기관이다.
중국 당나라에서 처음 등장한 교방은 중국 원나라 때 엮은 금나라의 역사책 '금사(金史)'에 따르면 발해에서도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교방의 활동은 고려시대부터 활발해져 왕실의 각종 연회나 팔관회ㆍ연등회ㆍ제례ㆍ가례(嘉禮) 등의 행사에서 가무를 담당했다. 조선시대에는 장악원(掌樂院) 밑에 아악을 담당하는 좌방(左坊), 속악을 담당하는 우방(右坊)을 뒀는데 둘을 합쳐 교방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각 지방의 교방에서 연희된 춤에는 무고(舞鼓ㆍ북춤)ㆍ포구락ㆍ헌선도ㆍ선유락ㆍ 아박무ㆍ향발무ㆍ처용무ㆍ연화대ㆍ검무(劍舞)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검무는 인기 종목이었다. 각 지방 읍지에 검무가 빠짐없이 기록돼 있으며 조선시대 문집에도 30여편의 검무시(劍舞詩)가 전해온다. 검무 동작이 생생하게 묘사된 글로는 유득공(1749~1807), 박제가(1750∼1805), 정약용(1762~1836) 등의 작품이 있다.
올해로 탄신 250주년을 맞은 정약용은 50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긴 조선 후기 실학파의 대표주자이자 '유네스코 세계인물'로 선정된 첫 한국인이다. 정약용이 19살 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근무 중인 장인 홍화보에게 문안을 하러 진주를 찾은 적이 있다. 홍화보는 사위를 위해 촉석루에서 연회를 베풀고 가무를 공연하게 했다. 정약용은 그 가운데 검무를 보고 춤 동작에 넋을 빼앗겨 그 흥취를 담아 '무검편증미인(舞劍篇贈美人)'이란 시를 썼다. 타고난 문장력과 어휘력으로 검무를 추는 기생의 복장과 걸음걸이, 검무 동작의 화려함을 극대화시켜 표현했다. '호리호리한 허리' '백 사람이 칼춤 배워 겨우 하나 성공할 뿐'이란 표현도 등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뛰어난 춤꾼이 되기는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현대인의 마음도 사로잡는 날 오길
교방청은 1910년 한일 합방으로 조선 왕조가 몰락하면서 폐지됐지만 진주검무는 진주권번을 통해 맥이 이어졌고 현재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돼 보존ㆍ전승되고 있다. 진주검무뿐 아니라 통영검무ㆍ평양검무ㆍ해주검무ㆍ함흥검무ㆍ밀양검무ㆍ호남검무ㆍ경기검무도 전승되고 있다. 검무 외에 교방을 통해 전승돼온 우리의 전통춤 가운데 문화재로 지정된 종목은 그나마 관심을 받지만 그 외의 춤들은 그렇지 못한 상황이다. 춤꾼의 절차탁마(切磋琢磨)의 노력과 함께 제도권의 관심이 늘어나 교방춤이 이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날이 오기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