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책] 트라우마에 빠진 네 젊은이의 동거

■ 선셋파크(폴 오스터 지음, 열린책들 펴냄)<br>평간 호평 오스터 새 소설<br>상실감 시달리는 주인공들<br>새 삶 찾아가는 과정 그려




폴 오스터의 신작 '선셋파크'는 저마다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방황하는 네 젊은이를 주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여러 등장인물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이 책은 그들의 '밑바닥 체험기'이기도 하고, 주인공 마일스와 아버지 헬러의 '화해담'이기도 하다.

대학 시절 의붓형을 사소한 다툼 끝에 실수로 숨지게 한 마일스는 필사적으로 현실에서 도피한다. 유능한 투수로서의 재능과 미래도 버리고, 대학마저 그만두고 사라진다. 결국 그 죄책감은 그를 한 치도 옴짝달싹할 수 없는 올가미로 몰아넣고, 그는 성장을 멈춘 채 뒷걸음질 친다. 과거도 미래도 없이, 오직 오늘 하루, 바로 이곳에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그러다가 담배와 술, TV와 라디오도 모두 끊고 지내는 7년여의 '유폐생활' 끝에 아직 미성년인, 정확히는 고등학생인 필라와 사랑에 빠진다. 여차하면 감옥행인 이 연애 중에 마일스는 결국 고교동창인 빙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필라 가족들의 협박에 몰려 도망치듯 뉴욕으로 돌아와, 시에 차압 당한 빈집 '선셋파크'에 불법 거주하는 4명 중 하나가 된 것이다.

나머지 세 동거인도 열등감과 불안에 시달리는 존재다. 스스로의 상처에 대해 불확실한 미래, 사라진 자신감은 끊임없이 이들 하나하나를 괴롭힌다. 등장하는 이들의 정서는 하나 같이 황량하고, 작품 속 소설가로 등장하는 렌조에 대한 묘사로 웅변된다. "난 그냥 어디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그는 언젠가 고통이 밴 눈빛으로 멍하니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들릴락 말락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냥 사라져 버리고 싶어."


주인공들의 상실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꿰뚫고 있는 정서는 소위 '미국식 낙관주의'다. 현실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된다는.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1946년 제작된 미국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해'로 연결된다. '우리 생애 최고의 해'는 2차 세계대전 참전군인들이 전쟁의 후유증 속에서도 새 삶을 찾아간다는 내용의 영화다. 어린 마일스가 독후감에 적었듯 "삶에서 상처는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며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입어 보아야만 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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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작가는 소설 후반부에 이르러 다소 조급함을 드러낸다. 아버지 헬러를 빌려 수년에 걸친 부자간의 화해를 빠르게 정리하고, 마일스가 현실로 돌아오는 장치를 서두른다. 앨런은 어린 옛사랑과 정염을 불태우고, 앨리스는 논문이 막바지 작업에 들어가며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품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마일스는 유명한 배우인 생모를 다시 만나고, 출판사 사장인 생부와도 화해한다. 10여년 스스로를 괴롭히던 '유형'생활이 끝난다. 하지만 마일스와 '선셋파크' 동거인들에게 경찰이 들이닥치고, 다소 거친 퇴거조치 수행 속에 흥분한 마일스는 한 경찰의 턱뼈를 박살내버린다. 다시 위기가 왔다.

마일스는 생각한다. 그리고 "미래가 없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이 가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금부터 어떤 것에도 희망을 갖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지금 여기 있지만 곧 사라지는 순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지금만을 위해 살자"고 다짐한다.

하지만 책 초반부에 도피 7여년간을 설명하는 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재를 사는 것, 지금 여기 말고는 생각하지 않는 이와 같은 능력.' 소설은 여기서 끝난다. 1만2,800원.

이재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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