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34년… “이제 조국위상 높일때”/63년 광부·간호사 진출 자영업 등 새삶/2세들 서구화사고로 세대간갈등 증폭/자녀에 민족적 자긍심 심어주기 확산지난 6월 14일 독일 모어스지방의 한 호텔에서는 퇴직 한인광부들의 친목모임인 「그뤽아우프」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파독광부 30년사」발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이 자리에는 홍순영대사를 비롯 3백여명의 전직 광부출신 교민들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그뤽아우프란 독일 광산촌에서 통용되는 인사말로 지난 73년 한인 광부들이 친목단체를 결성하면서 모임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독일교민사는 한마디로 광산근로자와 간호사들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광부와 간호사들이 입국하면서 독일 교민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들의 유입이 끊어지자 한국인의 독일 이주는 사실상 중단돼 버렸다.
미국 등 다른 나라의 경우 먼저 이주한 사람이 형제 등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초청이민이 가능했지만 독일정부는 이같은 이민방식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따라 현재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은 대부분 60∼70년대에 광부, 간호사 등으로 입국한 한인 1세대와 그들이 현지에서 낳은 2세들뿐이다.
○교포 1만7,000명 살아
지난해 독일대사관이 파악한 교민수는 대략 1만7천명. 이들중 상당수가 광산근로자와 간호사,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출생한 한인 2세들이다.
한국인 광부의 독일 진출은 지난 61년 대한석탄공사와 독일 지멘스(Siemens)사간에 체결된 「한국광부의 서독 취업에 관한 상호각서」가 첫번째 계기가 됐다. 이어 62년 양국간 투자보장협정이 체결되고 63년 12월 한국정부와 독일석탄광산협회가 상호 인력파견에 합의하면서 한국 광부의 서독파견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63년 12월 제1진으로 2백47명의 광산근로자가 독일땅을 밟은데 이어 66년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2천5백21명의 광부들이 입국했다. 이후 4년여의 공백기간을 거쳐 70년부터 77년까지 무려 40여차례에 걸쳐 5천4백15명의 광부들이 추가로 독일에 파견됐다. 15년동안 총 7천9백36명의 광부가 독일에 입국한 셈이다.
당시 파독광부의 인기는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외국에 나갈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은 시절이었던 만큼 학력수준이 높은 고급인력들이 대거 응모했고 이로 인해 「위장광부」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독일에 파견된 7천9백여명의 광부들은 대부분 3년간의 계약을 마치고 귀국하거나 미국, 캐나다등지로 이주했으며 나머지 1천3백여명이 현지에 남아 지금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뮌헨시 한인회장을 역임한 송준근씨(58)도 지난 70년 2차 파견광부로 독일에 들어와 정착한 케이스. 송씨는 『당시 원서를 접수하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파독광부의 인기가 대단했다』며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해외에 나가보고자 했던 열망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결과였다』고 술회했다.
그는 또 『당시 대마르크 환율이 80대1 정도였다』며 『공무원 한달 봉급이 1만5천원하던 시절이었던 만큼 1천마르크(8만원)만 벌어도 경제적으로 상당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광부들의 독일진출은 개인 소득증대라는 효과외에 국가 차원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국위선양은 물론 외화획득에 따른 국제수지 개선효과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또 독일정부와의 관계개선, 양국간 문화교류 확대 등 민간외교 차원의 성과도 적지 않았다.
이에따라 정부는 한국인 광부들이 유리한 근로조건을 확보할 수 있도록 현지에 노무관을 급파하고 2중과세방지협약을 체결하는 등 현지 근로자 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포는 『김포공항을 떠나올때만 해도 막막하기 그지없었다』며 『그러나 60년대 당시의 한국 경제사정에 비추어 우리같은 사람들이 해외에 나옴으로써 미력이나마 국가경제에 도움이 됐던 게 사실』이라고 시대적 역할론을 강조했다.
이와는 달리 간호사들의 독일진출은 정부주도가 아닌 민간주도로 이루어졌다. 이수길 박사 등 일부 재독 한인의사들의 주선으로 65년부터 76년까지 12년에 걸쳐 모두 1만32명의 간호사들이 독일에 입국했다.
한인 간호사들은 특히 친절하고 상냥해 독일인들에게 인기를 모았고 이에 자극받은 독일정부는 한국인 간호사들이 현지에서 결혼할 경우 체류기간을 연장해 주는등 혜택을 제공했다.
○1세대 역할 사실상 마감
뮌헨의대 신윤숙 교수(51)는 『독일 전체적으로 한인 간호사들에 대한 평이 좋았다』며 『당시 독일정부가 친절하고 상냥한 한인 간호사들의 귀국을 막기 위해 체류기간을 연장해주는등 각종 혜택을 제공했었다』고 밝혔다.
한인 간호사들중 상당수는 현지에 파견된 한국인 광부들과 결혼,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광부들 역시 간호사와 결혼해 체류기간을 연장받은 후 현지 기업체에 취직하거나 자영업에 나서는 등 새로운 삶을 개척했다. 이른바 한인 1세대의 정착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70년대 후반들어 간호사와 광산근로자의 입국이 중단되면서 한국인의 독일이주는 사실상 봉쇄돼 버렸다. 독일정부가 외국인의 이민조건을 강화함에 따라 한국인의 신규이주가 불가능해졌기 때문.
독일의 한인수는 이로 인해 70년대 이후 계속 정체상태를 보이고 있다. 다만 광부와 간호사들이 결혼해 현지에서 낳은 2세들이 성장, 한인사회의 또다른 중심축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는게 변화라면 변화다.
독일내 한인 2세들은 이제 대학생 또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는 연령층에 도달했다. 광부와 간호사로 출발한 한인 1세대들은 이들에게 한민족으로서의 자존과 긍지를 심어주고자 애쓰고 있지만 단절된 세대간의 의식차이로 인해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게 현지의 분석이다.
오응천 KOTRA 뮌헨무역관장은 『부모세대는 60년대 한국식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데 반해 자녀들은 거의 1백% 서구화된 의식을 갖고 있다』며 『이같은 이중문화속에서 자녀들에게 한국인의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한 많은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오관장은 특히 『독일 교민사회에서 1세대의 역할은 사실상 마감되어 가고 있다』며 『2세대들이 앞으로 어떤 활동을 보이느냐에 따라 독일 한인사회의 앞날이 좌우될 것』이라고 진단했다.<이종석 기자>
◎인터뷰/송준근 뮌헨 아시아상회 사장/“부부 맞벌이에 대화단절 아이들은 탁아소서 자라 정체성 인식교육 절실”
『현재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 1세대들의 가장 큰 고민은 자녀교육 문제입니다』
뮌헨 시내 모짜르트가에서 「아시아」라는 한국식료품점을 운영하고 있는 송준근 사장(58)은 한인 1세대와 2세대간의 의식차이가 현재 독일교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인 1세대들은 모두 돈벌기 위해 독일에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부모들 대부분이 맞벌이에 나섰고 아이들은 당연히 현지 탁아소에 맡겨졌지요. 이러는 사이 아이들의 사고방식은 완전히 독일화되어 버렸고 결국 부모들의 한국식 풍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게 된 겁니다』
송사장은 특히 2세들 가운데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할 줄 아는 아이가 많지 않다는 점을 지적, 『부모들이 아이들과 대화를 제대로 나누지 못했던 것도 사태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학때마다 자녀들을 무조건 한국에 있는 친척들에게 보내고 있다. 모국의 생활습관과 언어를 현지에서 직접 체득하고 돌아오라는 배려에서다.
전남이 고향인 송사장은 지난 70년 일간지에 게제된 파독광부 모집기사를 보고 응시, 치열한 경쟁을 뚫고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3년간의 광부계약 기간을 마치고 한국인 간호사와 결혼식을 올린 그는 레바쿠젠 소재 바이엘제약에 취직했다가 82년부터 뮌헨에 정착, 지금까지 한국식료품점을 운영하고 있다.
『독일이주 1세대들의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 2세들을 올바르게 교육시켜 독일사회내에서 한국인의 입지를 확고하게 굳혀나가야만 합니다』 송사장은 독일 교민사회의 앞날을 위해 2세들에게 모국을 알리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인터뷰/신윤숙 뮌헨대 의과대학 교수/“우리의 2세들 두뇌 우수 앞으로 의욕적 활동통해 한국인 입지강화 기대”
『70년대 독일에 진출한 한국인은 대부분 광부나 간호사들이었습니다. 나처럼 공부를 위해 입국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던 시절이지요』
신윤숙 뮌헨대 의대교수는 자신이 유학길에 올랐던 70년대 당시의 독일을 이같이 회고했다.
68년 서울약대를 졸업하고 곧바로 미 버클리대 유학길에 올랐던 신교수는 불과 3년6개월만에 생화학부문 박사학위를 취득, 주위를 놀라게 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 24세로 버클리대 사상 최단기 박사학위 취득기록을 세웠던 것이다.
이후 로체스터대학 연구원을 거쳐 독일 뮌헨대로 자리를 옮긴 신교수는 본격적으로 유전대사병 연구에 나서 지금은 이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유전대사란 근친혼으로 인해 유전자에 변이가 생기는 병을 말합니다. 뮌헨의대는 이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으며, 이런 평가에 대해 연구진들 모두 강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체구도 왜소한 동양계 여학생이 독일 명문의대 교수로 성장하고 아울러 주요 연구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는데 대해 그녀는 스스로 대견스러워했다.
신교수는 89년 정교수로 임명된 이후 지금까지 세계 유명 학술지에 유전대사와 관련된 2백여편의 논문을 기고하는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독일사람들은 머리가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꾸준히 노력해 여러 분야에서 세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분석한 신교수는 『우수한 두뇌의 한인 2세들이 계속 성장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 독일사회내에서 한국인의 입지를 더욱 굳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한인사회에 거는 기대를 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