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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 개입·탁상행정 탓에 부작용 커 소비자만 골탕
정책 목표 분명히 정하고 이해상충 줄일 균형 필요
골든타임도 중요하지만 방향 잘잡는 게 더 중요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장 티롤 프랑스 툴루즈1대학 교수. 독과점 기업에 대한 맞춤형 규제를 연구한 그는 해당 분야의 특성을 무시한 일률적 규제가 오히려 효율성을 저해한다고 설파했다.
티롤 교수는 여러 변수가 얽혀 있는 시장에서 바람직하고 적절한 규제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강조했다.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 정책당국의 규제정책은 이런 티롤 교수의 우려가 딱 들어맞는다.
저금리 기조가 심화되는 와중에 등장한 고정금리 대출 확대 정책, 경쟁 자체를 막는 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 등은 그 생생한 사례다. 이뿐만이 아니다. 저성장·고령화로 큰 틀의 경제구조가 바뀌고 있음에도 이전과 같은 관점과 잣대로 만들어진 부동산 활성화 정책, 임대차 선진화 방안 등은 시장의 부작용을 키우고 있다.
현실과 유리된 탁상행정, 급조된 근시안적 규제들이 이른바 '정책의 역설'을 만들면서 정부의 신뢰도를 깎아 먹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원혁 한국개발연구원(KDI) 규제연구센터 소장은 "정책은 타이밍도 중요하지만 이해 당사자와 그 주변이 어떤 영향을 받는지를 세밀하게 검토해 집행해야 한다"면서 "법률이나 규정을 제정할 때 들어가는 문구는 작은 것이라도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 정책=올 상반기 은행들은 고정금리 주택담보대출 상품의 금리 덤핑을 불사했다. 금융당국이 고정금리 상품을 전체의 20%로 맞추라고 제시한 시한이 연말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고정금리 대출의 금리가 변동금리 대출보다 더 낮아 금리체계에 대한 신뢰를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마저 제기됐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은행 입장에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로부터 2개월여가 흐른 지난 8월과 이달.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두 번에 걸쳐 역대 최저인 2%로 내렸다. 하지만 일부 은행이 상반기 금리인하의 여파로 대출금리를 인상하면서 여론은 들끓었다. 황망한 것은 당국의 지시에 따랐을 뿐인 은행이고 금리 피해를 보게 된 고객이다.
수수료 정책에서도 근시안적 정책의 폐단은 잘 드러난다. 당국의 수수료 인하 압박으로 은행의 수수료 수익은 2011년 7조8,217억원에서 지난해 말 7조3,206억원으로 2년 새 5,000억원 넘게 줄었다. 하지만 은행 법인세가 같은 기간 3조1,609억원에서 1조4,431억원으로 쪼그라들면서 장점은 희석됐다.
특히 연금저축의 경우 세액공제로 바꾸면서 올 1·4분기 연금저축 보유계약 건수가 216만1,770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약 7만6,000건 감소했다. 당장의 세수확보가 연금 외면 현상으로 귀결되면 결국 국가 재정부담이 가중된다. 한 금융계 고위관계자는 "눈에 보이는 것만 의식해 단기 처방을 내리면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단통법은 한술 더 뜬다. 일각에서는 단통법을 두고 정책의 역설이라기보다는 잘못된 정책으로 봐야 한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과도한 정부 개입이 시장 망쳐…골든타임보다는 방향 잘 잡는 게 중요=정책의 영향을 다각도로 따져보고 정책 대상자인 경제주체들의 인센티브가 서로 상충되지 않는지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 고위관계자도 "시장에 복잡한 변수가 많아져 과거와 같이 정부가 시장의 흐름 자체를 바꾸기는 힘들어졌다"면서 "이제는 직접 노를 젓기보다는 방향만 알려주는 조타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인식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해 관계자들이 정책에 맞춰 어떻게 행동할지를 예상하고 서로의 균형을 잘 잡아야 정책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 이인형 자본시장연구원 부원장은 "시장의 특성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정책 실패를 줄일 수 있다"며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당사자들 사이에서 균형감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정책 의사결정 메커니즘에 대한 따끔한 지적도 나왔다. 정부가 경기의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정책 입안시 전문가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않고 블라인드 방식으로 운영해 정책 실패가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다. 오정근 아시아금융학회장은 "(부총리의 표현처럼) 아무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려면 더욱 더 충분한 의견수렴이 필요하다"며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방향을 잘 잡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