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2월21일]<1325> 철도의탄생

1804년 2월21일, 영국 남부 웨일스 지방의 제철소. 괴기한 모습의 기관차가 ‘칙칙’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16㎞ 떨어진 운하 부근의 선적장. 승객 70명과 철광석 10톤을 실은 기차는 무사히 운행을 마쳤다. 소요시간 총 4시간5분. 평균 시속 4㎞에 불과했던 이날의 운행은 ‘최초의 기관차가 최초의 열차를 매달고 최초의 승객과 화물을 실어 나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철도가 탄생한 것이다. 군중은 광산업자 홈프레이에게 축하를 보냈다. 대저택을 매입할 수 있는 거액인 500기니가 걸린 내기였기 때문이다. 기관차를 설계ㆍ제작한 리처드 트레비식(Richard Trevithick)에게 특허권을 사들인 홈프레이는 ‘바보짓을 했다’는 다른 광산업자의 비아냥거림에 내기를 제안해 돈도 따고 최초의 철도업자라는 기록을 남겼다. 누구보다 운행 성공을 반긴 사람은 트레비식(당시 35세). 문맹이면서도 공학에 특별한 재능을 지녀 제임스 와트의 저압 증기기관을 고압기관으로 개량하고 1801년에는 증기자동차를 선보여 주목 받았던 사람이다. 문제는 여기가 트레비식의 정점이었으며 본격적인 철도의 등장에도 20여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점. 왜 트레비식의 철도는 성공하지 못했을까. 협궤형 목제 궤도가 2차 운행 이후부터 기관차의 하중을 견뎌내지 못한 탓이다. 트레비식은 1808년 기차 운행을 보여주는 서커스 사업을 시작했으나 입장료가 2.05파운드로 너무 비쌌던데다 주철로 만들어진 협궤철로 역시 약해 얼마 안 지나 문을 닫고 말았다. 결국 ‘철도의 아버지’라는 영광은 기관차 개량에서 철로의 재질 개선, 폭 확장까지 힘을 쏟은 조지 스티브슨에게 돌아갔다. 산업화 초기 공간혁명을 이끈 철도혁명에는 트레비식의 작은 성공과 큰 불운이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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