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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현대 함께 숨쉬는 틀을 깨는 전시 많이 개최
물품보관소·쉼터 대폭 늘려 고객에 양질의 서비스 제공
어릴때 문화적 소양 쌓아야 어린이 관람 교육에도 관심
기업과 발전적 동행 위해 협력의 문 언제나 열어둘것 "한국 문화를 이야기할 때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도자(陶瓷)'입니다. 외국 박물관들이 한국 컬렉션(소장품)을 제대로 확보하고 있는 것의 상당수가 도자기거든요. 그래서 종종 '한국 도자의 우수한 전통이 있는데 현대 도자는 어떻게 돼 있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우리가 사고의 틀을 깨야 하는 이유죠. 박물관이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 곳이라는 생각에 머물 필요는 없습니다. 과거의 한 시점에서 마침표를 찍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와 현재의 연결도 함께 보여줘야죠. 새로운 시각으로 '틀을 깨는 전시'를 해보겠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취임한 지 한 달여 된 김영나 관장은 최근 관장실에서 가진 서울경제신문의 인터뷰에서 이 같은 포부를 밝혔다. 김재원(1909~1990) 초대 국립박물관장의 딸이자 미술사학자이고 박물관에서 자란 사람으로서 박물관에 대한 그의 관점은 남달랐다. 김 관장은 "한국의 청자나 백자ㆍ분청사기 전시를 한다면 그 전통을 계승한 현대 도자까지도 박물관이 함께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며 "회화ㆍ도자기ㆍ불교미술 같은 기존에 짜여진 카테고리에 얽매이지 말고 벽을 허물어 새로운 시각으로 보면서 틀을 깨야 한다"고 말했다. 관장 취임 이전부터 안타깝게 여기던 부분인 동시에 최근 업무파악을 통해 내린 결론이기도 하다. 지난 2005년 10월 경복궁에서 현재의 용산구 이촌동으로 신축, 이전한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해 세계 박물관 관람객 수 조사에서 아시아 1위, 세계 10위에 올랐다. 올 1월에는 용산 개관 이후 누적 관객 수 1,500만명을 돌파했다. 150여명의 학예사와 행정직을 포함해 500여명의 직원들이 박물관을 지탱하고 있다. 김 관장은 양적 성장을 이룬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제는 질적 성장을 이룰 때라고 강조했다. "박물관의 3대 요소인 건물, 소장품, 학문적 깊이는 일정 수준 이상 갖췄다고 봅니다. 한 해 평균 300만명의 관람객이 찾아오는 세계 10위의 박물관이 된 지금 질적 상승을 통해 도약해야 세계적 수준의 박물관이 될 수 있습니다. 재임기간 중에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작은 부분의 부족함을 채워가는 게 제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관장은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친절하고 편안한 박물관'을 표방한다. 위압적이고 학습에 대한 의무감으로 느껴지는 박물관이 아니라 편안하고 재미있는 휴식처 같은 복합문화공간을 추구한다. 따라서 관람객 입장에서 관객 친화적인 서비스를 확보할 계획이다. 그의 취임과 함께 박물관에서 맨 먼저 달라지는 게 휴식공간 확충이다. "외국 박물관의 경우 겨울에 가면 외투를 보관해주는 곳이 있어 짐을 맡기고 홀가분하게 몇 시간씩 돌아보고는 하는데 우리 박물관은 그게 없더라고요. 물품보관소가 먼저 생길 겁니다. 그 다음은 휴식공간이에요. 세계적인 박물관들의 최근 경향은 휴식공간을 중시한다는 점입니다. '박물관에 가면 다리가 아프다'고 흔히들 생각하잖아요. 조그마한 공간이라도 의자에 앉아서 바깥을 바라볼 수도 있고 작은 탁자에 마주앉아 대화도 나눌 수 있는 그런 공간이 필요해요. 박물관 규모에 비해 식당도 부족한 편이에요. 올봄부터 이런 점을 보완해나갈 계획입니다." 박물관의 하드웨어뿐 아니라 한국 문화라는 소프트웨어의 세계적인 경쟁력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일 또한 그의 고민거리다. 김 관장은 "우리 박물관의 실천 목표를 내실화ㆍ정보화ㆍ세계화로 설정했다"며 "특히 국제화 부분은 최근 10년 동안 비약적인 성과를 이룬 만큼 박물관은 우리 문화가 무엇인지 그 정수를 보여주는 것이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양미술사를 전공한 김 관장은 임명 초기에 일각에서 문화재 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995년부터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15년 이상 재임하면서 고고학 및 한국미술ㆍ불교미술 연구자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해 다양한 경험과 안목을 쌓아왔다. 최근 제기된 일각의 '기우'는 일찍이 2003년 서울대박물관장을 맡으며 자신이 되짚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서울대박물관은 고고학 중심인데 현대(미술)를 전공한 내가 괜찮을까 걱정했지요. 그런데 고고학 지식이 있어야 박물관장을 잘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관장은 기본적인 방향을 설정해 이끄는 역할이니까요.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우 유능한 학예사들이 두루 포진해 있으니 나는 그 전문가들을 믿고 박물관의 방향은 의논해 설정해가면 됩니다." 오히려 서양 문화의 강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20여년간 한국 근현대 미술을 연구해온 김 관장의 이력은 동서양을 아우르는 문화적 관점으로 한국 문화의 정수를 세계에 알리는 데 유리할 수도 있다. "우리가 남들에게 한국 문화를 보여주면서 우리 것만 알아서는 될 일이 아니에요. 서양인의 입장에서는 사실 한국과 일본ㆍ중국의 문화적 차이를 잘 몰라요. 한국 문화의 특징과 정수를 보여주려면 세계적인 관점에서 비교하며 보여줘야 효과적입니다. 그래서 우리 박물관 학예연구실에 유물관리ㆍ고고역사ㆍ미술부 외에 아시아부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박물관이 한국 유물만 전시한다고 한정지어서는 안 되죠. 가령 18세기 조선 문화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동시대 중국과 일본은 어땠는지, 확장해서 서구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비교하면서 세계적인 맥락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최근 박물관에서 그리스ㆍ이집트ㆍ잉카 등 해외문명 특별전이 열려 관람객의 큰 인기를 얻었지요. 박물관의 중심은 한국 문화지만 남의 것을 알면 우리 것을 더 잘 들여다볼 수 있다는 얘기지요." 역사와 유물의 보고(寶庫)인 박물관은 발상의 전환을 원하거나 평범한 일상을 문화적으로 재발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운영하는 '창조적 CEO 최고위 과정'도 이 점에 기반한다. 김 관장 자신도 미국에 가서 한국미술사 강의를 처음 들었을 정도로 우리 사회의 중장년층은 사실 한국미술사나 문화를 공부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김 관장은 중장년층과 직장인에게는 수요일 저녁에 운영되는 '큐레이터와의 대화' 같은 프로그램을 추천하면서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어릴 때부터 박물관에서 놀아야 문화적 토양이 달라지고, 결국 문화의 저력이 쌓이게 됩니다. 박물관에 가면 꼭 뭔가를 배워와야 한다는 의무감보다 그 안에서 보고 즐기다 보면 자연스레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생겨나거든요. 제가 아버지의 영향으로 미술사학자가 됐지만 진짜 공부는 1970년대 유학시절 아버지와 함께 다녀온 그리스ㆍ이탈리아ㆍ스위스 등지의 유럽여행이었어요. 마냥 구경하면서 좋은 기분을 만끽해야 그 행복감이 몸에 배고 생활로 파고듭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어린이 관람객이 많게는 하루 2,000명이고 학생 단체관람이 전체의 40%를 차지한다. 중앙박물관은 어린이 관람 교육을 위해 국립현대미술관과 공동으로 관람예절 홍보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계획이다.. 창조적 경영을 위한 관람 노하우로 김 관장은 "잘 아는 것부터 보라"고 권했다. 모르는 작품보다는 책에서건 어디서건 본 적이 있는 익숙한 것에 관심이 먼저 가고 기억이 오래 남는다는 얘기다. 박물관에 도착하면 시간도 순서도 잠시 잊고 아는 것들을 찾아다니라고 조언했다. 이와 함께 김 관장은 기업과 박물관의 발전적 동행관계를 위해 대문을 활짝 열어두겠다는 의지도 분명히 했다. "현대카드는 뉴욕현대미술관(MoMA)을 지원하고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은 삼성과 큐레이터십에 관한 협력을 하고 있습니다. 기업의 기여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들어서면 입구 중앙계단 양쪽에 아름다운 꽃이 있어요. 한 후원자가 일주일에 한 번씩 꽃장식 비용을 대겠다며 평생 후원한 것이랍니다. 후원은 대단한 것도 별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박물관도, 후원도 생활이고 삶이거든요." 문화가 이윤 추구와 별개라지만 경제력은 문화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문화에 대한 투자가 비약적으로 증가했음에도 우리 국력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문화는 결국 돈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이탈리아 피렌체는 부를 이룬 메디치 가문의 후원이 있었고 르네상스를 꽃피우게 된 것이죠. 2차대전 이전까지 존재감도 없던 미국 미술이나 최근 급부상한 중국의 영향력은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국력에서 비롯했습니다. 제가 박물관장으로 일하는 동안 문화에 대한 후원과 질적 향상의 과정에 개인적인 지식과 경험이 보탬이 됐으면 좋겠고 박물관이 세계적으로 도약하는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약력 ▦1951년 서울 ▦1969년 경기여고 ▦1973년 미국 뮬렌버그대 미술과 ▦1980년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미술사학박사 ▦1980년 덕성여대 교수 ▦1990~1991년 도쿄대 객원연구원 ▦1993~1995년 서양미술사학회장 ▦1995년 한국미술사교육연구회장 ▦1995~2011년 서울대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2001년 하버드대 객원연구원 ▦2003~2005년 서울대박물관장 ▦2004년 한국박물관협회 이사 ▦2006~2009년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장 ▦2007년~ 문화재위원회 근대문화재분과 위원
7월 해외문화재 특별전 통해 선봬 9월‘한중일 초상화의 비밀’展등 올 23개 이상 신규기획전 준비 제11대 신임 관장을 맞은 올해 국립중앙박물의 올해 전시 가운데 으뜸은 오는 5월 프랑스로부터 돌려받아 14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는 외규장각 도서 특별전이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부터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받는 국립중앙박물관은 7월18일부터 상설전시실 안에 특별전시장을 마련해 '해외 문화재 특별전'을 통해 이를 선보일 계획이다. 이 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은 올해 최소 23개 이상의 신규 기획전을 준비하고 있다. 김영나 관장은 9월27일부터 11월6일까지 여는 '한중일 초상화의 비밀(가제)'전에 특히 기대해달라고 당부했다.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등 150여점의 초상화만을 모은 전시다. "한중일의 초상화를 보여주는 전시에서 시공을 넘나드는 기획을 시도해볼 계획입니다. 서양의 경우 화가의 자화상이나 군주의 초상화가 다양한 편이죠. 우리나라는 군주의 어진, 공신도, 회갑연 등 행사를 맞은 가족 초상이 있는데 이런 초상화가 지금으로 치면 기록적인 사진에 해당해요. 그런 관점에서 현대작품까지 함께 선보일 생각이에요.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니 근대에 이르러 표현이나 기법ㆍ재료 면에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비교하면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근대로 올수록 자의식의 발현으로 자화상이 많아졌습니다. 근대의 의식 반영과 그 전환점을 재미있게 보여드리겠습니다." 한편 대규모 기획전은 영국 빅토리아앨버트박물관 소장품 150여점을 대여한 '1600∼1800년 유럽의 장식미술(5월3일∼8월28일)'과 바티칸박물관 소장 르네상스 미술품 150여점을 빌린 전시(12월6일∼내년 4월1일) 등이 예정돼 있다. 해외 전시는 한국ㆍ호주 수교 50주년을 기념해 신라 금관 등 140여점을 호주 파워하우스박물관에서 선보이는 '찬란한 보물:한국의 금속공예(11월10일∼12월2일)'가 열린다. 특별전은 조선시대 묘지명 130여점을 정리하는 '조선시대 묘지명(∼4월17일)', 국립국악원과 공동 주최하는 '한국의 악기(5월10일∼6월26일)', 중국 산둥성 출토 손자병법 죽간(竹簡)과 일본의 3대 고비(古碑) 중 하나인 다호비(多胡碑)가 국내 처음으로 소개되는 '문자로 본 고대인의 생활(10월4일∼11월27일)' 등이 마련된다. |
어릴때부터 부친 영향… 고고학·문화재에 관심 우리나라 근대 박물관의 시작은 100여년 전인 지난 1909년 11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창경궁 제실박물관을 국민에게 개방하면서부터다. 당시 순종은 '백성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눈다'는 뜻의 여민해락(與民偕樂)을 내세웠다. 1945년에 초대 국립박물관장에 오른 김재원(1909~1990) 박사는 그해에 태어났다. 함흥 출신의 김 박사는 1929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 10년간 미술사와 고고학을 공부했다. 일반인들은 박물관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던 시절, 미 군정청의 임명으로 박물관장이 돼 1970년까지 25년간 박물관의 기틀을 마련했다. 김영나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김 박사의 막내딸이다. 부친이 역임한 그 자리를 맡은 김 관장은 최초의 부녀 국립중앙박물관장이라는 '가문의 영광'을 이루게 됐다. 김 박사의 큰딸이자 김 관장의 언니인 김리나(69) 홍익대 명예교수는 한국 불교미술사의 권위자로 명망이 높다. 2007년에는 두 자매가 나란히 문화재 위원으로 위촉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김 박사는 일찍이 '세계인'으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애썼다. 미 군정이 군용막사를 짓기 위해 경복궁을 파헤친 사실을 지적해 곤욕을 치른 일화가 유명하다. 1946년에는 해방 후 한국 최초의 유적 발굴인 경주 호우총 발굴을 주도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는 미군 열차를 빌려 귀한 문화재들을 부산으로 피난시켜 폭격을 피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김 박사는 또 1957년에는 미국 수도 워싱턴의 내셔널갤러리에서 대한민국 국보의 해외 전시를 진행해 한국 미술을 해외에 소개하는 첫 계기를 마련했다. 김 관장은 부친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박물관을 집처럼 드나들었고 국제화된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제가 어릴 때 아버지는 늘 바쁘셨어요. 당시 박물관은 예산이 빠듯해서 외국 손님이 오시면 우리 집에서 식사 초대를 했는데 한국 전통음식을 대접하되 외국 사람들이 익숙한 코스로 대접한 기억이 나네요." 김 박사는 자신이 박물관의 기반을 다지고 두 딸을 미술사학자로 키워낸 것 외에도 전문가 양성에 주력했다. 불모지이던 한국 고고학을 이끈 삼불 김원룡(1922~1993)과 저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로 대중과도 친숙한 최순우(1916~1984), 한국미술사의 안휘준, 김난영 등 인재들의 뒤에는 늘 김 박사의 지지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