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이 무거울 수록 당신은 더욱 내려놓고 싶을 것이다. 또 운명의 여신 같은 더 크고 강력한 수레에 떠넘기고 싶을 것이다. 어두운 숲길, 당신을 안으로 들이고 싶어하는 세상 속에서 당신의 운명과 고독은 삶을 지독한 투쟁으로 만들어 버린다. 장애물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당신은 뒤처지거나 낙오하게 된다. 그저 존재하기 위해 발전해야 하며, 올라가야 하며, 방어해야 하며, 지켜내야 한다.
저자인 제임스 힐먼 교수는 이 책에서 묻는다. 무엇인가 우리를 어떤 특별한 길로 이끄는 듯한 느낌이나 충동을 느낀 적이 있는가? 혹은 삶을 반전시키는 사건들을 알리는 신호, 그래서 '나는 이 일을 해야 하고 이걸 가져야 해.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생각들이 떠오른 적 없는가, 하고.
바로 '운명의 부름'에 대한 이야기다. '나'라는 독특한 사람이 여기에 있는 이유가 분명히 있고, 나아가 세상은 어떻게든 '내'가 이곳에 존재하기를 원하며 각자 타고난 '영혼의 코드' 혹은 운명을 향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삶이란 어떤 것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현실로 구현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그는 현대인들의 방황에 대해 삶이 말하는 커다란 끌림, 혹은 운명을 이끄는 키워드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또 이를 되찾기 위해 먼저 자신의 삶을 어떤 우연한 일이나 호기심, 가능성 문제, 작은 사건에 맞춰 되돌아보라고 강조한다. 운명을 뜻하는 그리스어 모이라(moira)는 원래 각자의 몫, 할당된 부분을 뜻하는 것으로, 운명이 삶의 전부를 장악하고 뒤흔든다기 보다는 일부분의 몫만 가지고 불러낼 뿐이라는 것이다.
스페인을 34년간 철권통치한 독재자 프란시스코 총통,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독일 전쟁영웅 에르빈 롬멜, 달리 설명이 필요 없을 인도의 모한다스 간디. 이 셋의 공통점을 굳이 찾는다면, 모두 어렸을 적 작고 병약하며 겁이 많고 어눌한 아이였다는 점이다. 보상이론으로 설명하자면 훗날 펼쳐질 우월성의 뿌리는 어린 시절 초기 열등감에 묻혀있고, 작고 병약하고 슬픔에 겨운 아이에게는 욕구가 있다는 식이 된다. 하지만 힐먼은 '필연적인 우연한 사고'를 통해 자기 소명과 형상이 드러나며 삶을 형성한다고 봤다.
열여덟 살 윈스턴 처칠은 전쟁놀이 중 사고로 두개골에 금이 가고 신장이 파열됐지만, 긴 회복기간 동안 사색을 통해 자기 발견에 도달했다. '피터팬'의 저자 제임스 베리의 형은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죽었고, 이 충격으로 몸져누운 어머니를 위해 제임스 베리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으로 '피터팬'을 시작한다. 저자는 이런 류의 암담한 사건은 절대로 삶 속에 통합되지 못하지만, 영혼의 형상에 당혹감과 민감함, 취약함, 상처 조직을 덧붙여 형상의 완결성을 강화한다고 봤다.
힐먼 교수는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고 거기에 충실하라"고 하지만 기존 자기계발서가 던지는 '낡아빠진 힐링'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당신은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세상은 당신이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2011년 작고한 고 제임스 힐먼 교수는 미국 예일대, 시카고대, 이탈리아의 시라쿠사 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해온 저명한 심리학 교수다. 취리히 융 연구소에서 10년간 소장으로 일하며 '모든 생명에 활력을 불어 넣는 근본적인 판타지'에 집중하는 원형심리학(Archetypal psychology)를 개척했다. 소명ㆍ운명ㆍ기질과 타고난 이미지를 통합해 설명하는 '도토리 이론'을 창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