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리뷰] 연극 '키친' 쳇바퀴 같은 주방서 그려진 현대인의 자화상


한 무대에서 30여명의 배우들이 동시에 움직인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고 접시를 옮기고 그릇을 내던지며 칼질을 한다. 대형 레스토랑의 주방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무대는 대형 후드(열 흡입기), 가스오븐, 냉장고, 조리작업대 등 실제 주방용 시설과 접시 300여장으로 가득 차 있다. 국립극단이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올린 '키친'(이병훈 연출)은 1959년 영국 런던 로얄 코트극장에서 세계 초연된 작품이다. 작가 아놀드 웨스커가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일한 경험을 살려 쓴 작품은 세계 각국에서 지속적으로 공연되고 있으나 거대한 무대 장치와 30여명에 달하는 배우의 출연으로 인해 그 동안 국내에선 시도하지 못했다. 작품 배경은 '티볼리'라는 영국의 대형 레스토랑이다. 하루 1,500명의 손님이 찾아 숨 쉴 틈 없이 바쁜 식당이라는 노동 현장을 작가 특유의 관찰력으로 날카롭게 포착했다. 1막은 식당에 새로 들어온 아일랜드 청년 케빈이 겪는 아수라장과 같은 일상사로 시작한다. 식사 주문이 몰릴 때 30명에 가까운 요리사와 여종업원들이 쉴새 없이 떠들고 윽박지르고 요리를 만들고 완성된 요리를 나르면서 부산하게 움직인다. 1막 마지막 장면은 주문한 음식이 제때 조리되지 않자 홀 종업원과 요리사 간에 실랑이가 벌어지면서 전쟁터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노동 현장의 한 줄기에선 주인공인 23살 독일 청년 요리사 피터와 유부녀이자 식당 손님들에게 인기 있는 여종업원 모니크의 숨겨진 애정 관계가 드러난다. 피터는 지긋지긋한 식당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자고 하지만 일상이 주는 편안함을 포기할 수 없는 모니크는 갈등한다. 그들의 갈등은 결국 파국적인 종말을 예고한다. 2막은 점심 시간이 끝나고 저녁 준비를 하기 전 휴식을 취하는 요리사들이 각자 자기의 꿈을 이야기하면서 시작된다. 주저하면서 고심 끝에 말하는 그들의 꿈은 참 소박하다. 잡동사니 만들기를 좋아하는 요리사는 작업실을, 맘껏 잠을 잤으면 좋겠다는 한 요리사는 늘어져 잘 수 있는 시간과 침대를, 하루 종일 디저트 만드느라 데이트조차 못하는 한 요리사는 여자 친구를 갖고 싶다고 말한다. 일상에 매몰돼 꿈을 꾸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현대인의 자화상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곧 생존의 시간이 다가오자 이들을 서로를 할퀴고 미워한다. 일상적인 삶이 사회라는 거대한 조직 속에서 얼마나 정치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 드러내는 대목이다. '키친'은 전혀 새로운 시도지만 스토리 전개가 자칫 관객들에게 부산스럽다 못해 산만하게 비춰질 수 있고 보기에 다소 거북한 장면도 있어 위험 부담도 있다. 하지만 그간 작품성 못지 않게 상업성도 확보한 것으로 평가받던 국립극단의 도전 정신은 높이 살만하다. 오는 6월 12일까지 명동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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