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DJ 서거] 한국정치사 '영원한 政敵' …막판 극적 화해모습 보여

■ YS와의 질긴 악연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위험한 고비를 넘긴 10일 오전 김영삼 전대통령이 병문안을 마치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홍인기기자

SetSectionName(); [DJ 서거] YS와의 질긴 악연 한국정치사 '영원한 政敵' …막판 극적 화해모습 보여 이현호 기자 hhlee@sed.co.kr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위험한 고비를 넘긴 10일 오전 김영삼 전대통령이 병문안을 마치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홍인기기자 ImageView('','GisaImgNum_1','default','260');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대중(DJ) 전 대통령. 오늘의 한국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한 정치인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한국 정치사의 고비 때마다 치열한 경쟁을 거치면서 악연으로 점철돼 '영원한 정적(政敵)'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끝까지 손 잡기 어려울 것 같았던 두 사람은 최근 YS의 DJ 병문안을 계기로 막판 극적으로 화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YS와 DJ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사독재 시절에는 민주화 투쟁 동지로 재야세력의 한 축을 이뤘다. 지난 1980년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활동 당시를 비롯해 군사정권이 계속되는 시기에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6ㆍ29 민주화 선언 이후 이들은 서로 대척점에 서게 됐다. 특히 이들은 현직에서의 라이벌 관계가 퇴임 이후에도 서로의 행보에 날을 세우고는 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는 각각 보수세력과 민주세력으로 상징되는 동시에 영남과 호남의 대표 정치인으로 거론되면서 뿌리 깊은 지역갈등만큼이나 현실 정치권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끼쳤다. 정치권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를 줄기차게 '물과 기름' 사이로 불렀다. 일각에서는 "무덤 앞에서도 화해가 불가능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두 사람의 악연은 질기다. 두 사람이 직접 맞붙은 것은 1968년 신한민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1992년 대통령선거까지 네 번이다. 전적은 2승 2패.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과 1992년 대선에서는 YS가, 1971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과 1988년 총선 때는 DJ가 이겼다. 물론 두 사람의 악연은 한때 DJ가 1997년 '대선 4수' 끝에 평생의 숙원인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끝나는 듯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대립과 갈등은 역사적 필연일까. 두 사람은 '정치 룰'을 깨고 계속 부딪쳤다. 1998년 DJ정권이 들어선 후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명분으로 YS를 무너뜨리는 작업이 진행됐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원인 규명을 위한 청문회를 통해 YS의 경제 실정들이 낱낱이 드러났고 결국 국민들 생각 속에 YS는 '경제 망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됐다. YS정권에 몸담았던 당시 실세들은 DJ와 YS 간 화해가 불가능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IMF 청문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두 사람의 정치적 갈등은 2007년 치러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종착역에 이르렀다. 사실상 마지막 대결이자 정치게임인 셈이였다.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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