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24년 케케묵은 부가세] 정치 후진국 일본도 고치는데… 표심·여론 부담에 손도 못대

세율 묶어놓고 비과세·감면 늘려<br>매년 수조원대 세수 공백 초래<br>세율 단계 인상·공제 혜택 축소<br>복수세율 도입 등 대안으로 거론<br>대선주자도 명확한 입장 밝혀야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 쇼핑객들이 제품을 사기 위해 긴 줄을 서 있다. 내수시장 침체로 지난해 부가가치세 국내분이 2년 사이 3분의1 토막 났다. /서울경제DB



서울 송파에 위치한 한국조세연구원의 한편. 올해 하반기 정부의 세제개편을 위해 부가가치세 연구용역을 수행하고 있는 한 연구원의 방문에는 알록달록한 색칠이 된 유럽 지도가 한 장 붙어 있다. 지도에는 경제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의 최근 재정 현황과 세율 인상 현황 등이 빨간색ㆍ노란색 등으로 표시돼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주요 유럽 국가들이 재정 확보를 위해 일제히 부가세율을 1~3%포인트씩 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국은 17.5%이던 세율을 20%로, 스페인은 16%이던 것을 18%로 인상했다. 그리스ㆍ아일랜드ㆍ포르투갈도 각각 19~21%이던 세율을 23%로 상향 조정했다. 이탈리아는 20%이던 것을 21%로 소폭 올렸다.


이뿐만이 아니다. 경제대국임에도 정치적으로는 신흥국 수준의 취급을 받는 일본조차도 최근 소비세율(일종의 부가세) 인상법안을 중의원에서 처리했다. 일본 여당은 이로 인해 분열의 위기까지 겪고 있지만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고령화와 경기침체에 따른 재정적자를 극복하자며 정치적 생명을 걸고 밀어붙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저출산ㆍ고령화, 경제성장 둔화 및 하락반전, 재정적자 등을 겪고 있는 국가다. 우리나라 역시 이와 상황이 다르지 않지만 국회와 조세 당국은 부가세 인상 논의를 입밖에 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하고 있다. 표심과 여론 때문이다. 새누리당 정책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대선이 코앞인데 현실적으로 세금을 올린다는 공약을 할 수 있겠느냐"며 "세금을 올리기는커녕 공제를 더 확대해 세 부담을 낮추자는 목소리가 더 커질 것"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여야는 지난해 말 부가세 부담을 줄여주는 매입세액공제 혜택을 음식점에 대해 영구화하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원래 해당 조항은 일정 기간만 세제 혜택을 조건으로 조세특례제한법에 있던 것인데 이를 부가세법상의 상시적 공제조항으로 바꾼 것이다. 더구나 해당 공제율은 수년 전 카드가맹점 수수료율이 너무 높다며 음식점주 등이 항의하자 정부가 공제율을 높여준 것인데 최근 가맹점 수수료율이 크게 낮아졌음에도 공제율은 기존 수준으로 정상화되지는 않았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기업인과 농민 등이 여기저기에서 "왜 식당에만 세제혜택을 주느냐"며 반발, 자신들도 부가세 의제매입세액공제 혜택을 상설화해달라고 입법청원을 하고 있다. 선진국들이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부가세 확보에 혈안이 돼 있는 것을 보고도 우리나라만 역주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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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부가 부가세 제도를 시행한 것은 지난 1977년부터다. 당시에는 표준세율을 13%로 정하되 품목에 따라 최대 3%포인트까지 깎아줄 수 있는 탄력세율을 함께 적용했는데 1988년 탄력세율제도를 폐지했고 표준세율도 10%로 낮췄다. 이후 '부가세=10% 단일세율'이라는 등식이 올해까지 24년째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국회와 정부는 이처럼 세율은 방치해놓고서는 비과세ㆍ감면폭만 대폭 늘려왔다. 농민의 경우 농업용 석유류ㆍ기자재 등에 대해 아예 0%의 부가세율을 부가 받는 영세율 혜택을 거의 영구적으로 누리고 있어 매년 수조원대의 세수 공백이 초래되고 있으며 소상공인 등도 파격적인 매입세액공제 혜택 등을 받고 있다. 국세청의 한 관계자는 "솔직해 매입세액공제율을 높여준다는 것은 정부가 두 눈을 뜨고 탈세를 용인해주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서민정책이라는 식으로 정치권과 이해단체들이 밀어붙이니 막을 도리가 없다"고 지적했다.

기저귀 등 각종 생필품 등도 물가안정이라는 차원에서 영세율 혜택을 받고 있지만 해당 업체들은 세제혜택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자판매가격을 낮추기는커녕 되레 높여 원성을 사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부가세 세율을 단계적으로 높이고 공제 혜택을 대폭 축소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좀처럼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기획재정부의 한 관계자는 "세율을 올리거나 공제율을 축소ㆍ폐지하면 이를 빌미로 업체들이 생필품 등의 가격을 마구 올릴 게 뻔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부가세율 인상에 따른 물가인상 부작용을 막기 위해 현재의 단일세율체제를 복수세율(표준세율과 저감세율의 이중 체제)로 바꿔 생필품 등 물가민감품목은 표준세율보다 낮은 저감세율을 적용하는 방안도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정치권이 표심을 노리고 저감세율 적용 품목을 대거 늘리면 표준세율을 올려도 세수확충 효과를 내기 어렵다는 게 재정부의 분석이다. 더구나 정권 말이어서 부가세를 대수술할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게 정부 안팎의 관측이다.

이에 따라 현 정부 내에서는 조세 당국이 차기 정부를 위한 부가세 개혁 중장기 로드맵을 내부적으로 만들고 여야의 주요 대선주자들 역시 재정건전성 확보차원에서 부가세 개편에 대한 입장ㆍ공약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고언이다.

민병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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