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8월19일] 1478년 세기의 결혼


1478년 8월19일 겐트. 당대 최고의 부자 마리 드 부르고뉴(Mary of Burgundy)의 결혼식이 열렸다. 요즘의 네덜란드와 벨기에ㆍ룩셈부르크는 물론 프랑스와 독일까지 퍼져 있던 부르고뉴는 당시 가장 부유했던 지역. 때문에 마리에게는 무수한 청혼이 쏟아졌다. 콜럼버스의 항해를 지원한 이사벨 여왕과 훗날 결혼하게 될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왕자를 비롯해 수많은 왕족들이 영토와 재산을 노리고 마리에게 매파를 넣었다. 심지어 프랑스는 신부보다 13세나 어린 코흘리개 왕자와 결혼시키자고 우겼다. 부친인 ‘대담공 샤를’이 스위스군과 벌인 낭시전투(1477년)에서 전사해 혈혈단신이 된 뒤 마리의 성가는 더욱 높아졌다.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보증수표인 마리와 결혼에 성공한 주인공은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마리는 생전의 부친이 적대시한 프랑스 왕실에 맞서기 위한 방편으로 언어마저 통하지 않는 그를 택했다. 20세기 초까지 유럽 최고 명문 중 하나로 군림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반이 여기서 닦였다. 결혼 당시 20세인 마리는 두 살 연하인 신랑 막시밀리안과 찰떡궁합을 과시했으나 결혼 4년 만인 1482년에 사냥 중 낙마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마리가 죽은 후 막시밀리안은 침식을 잊을 만큼 상심했으나 합스부르크 가문은 날개를 얻었다. 탄탄한 재력을 바탕으로 막시밀리안은 아내 사망 4년 뒤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도 뽑혔다. 부르고뉴의 드넓은 영지와 모직ㆍ조선 등 알짜배기 산업의 상속권은 장남 ‘미남공 필립’을 거쳐 친손자인 카를 5세가 물려받았다. 이사벨 여왕의 외손자이기도 했던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 전역, 이탈리아 중남부까지 통치하며 최강국 스페인의 시대를 열었다. 마리와 막시밀리안의 결혼은 근대를 향한 이정표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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