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은 국가경제 軸…경영권 보호해줘야" [사회대타협, 더 미룰순 없다] 옐레 피서르 암스테르담大 교수 “네덜란드 국민들은 최대 은행인 ABN암로가 영국계 헤지펀드의 공격을 받아 해외로 넘어간 것을 뼈아픈 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국민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기업의 경영권은 최대한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덜란드의 사회협약과 성장신화를 분석한 역작인 ‘네덜란드의 기적(A Dutch Miracle)’의 저자 옐레 피서르(62ㆍ사진) 암스테르담대 교수는 “우리가 성공을 거둔 것은 사회 구성원 간의 지속적인 대화 덕분”이라며 국민과 기업의 끊임없는 소통을 사회 대타협의 중요한 요소로 강조했다. 기업을 과잉보호해 외국인 투자를 막아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국가경제의 원동력인 기업들이 외국자본의 무차별적인 인수합병(M&A) 시도에 노출돼 경영권마저 빼앗기는 상황을 방관해서는 안된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피서르 교수는 “지난 25년 동안 네덜란드에서는 고용과 삶에 대한 만족도 등에서 큰 변화가 있었고, 이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며 “젊은 층에 대한 투자와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분명히 밝을 것”이라고 밝혔다. 암스테르담 시가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학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네덜란드 사회협약인 ‘폴더 모델’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석학답게 구체적인 수치와 사례를 들어가며 네덜란드의 경험과 전망을 소개했다. 또 한국의 비정규직 문제나 기업의 경영권과 같은 민감한 질문에도 나름의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기적’의 저자를 직접 만나게 돼 영광입니다. 책에도 설명돼 있지만 지난 25년 동안 네덜란드에서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죠. 돌아보면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고용률이 상당히 높아졌고, 특히 많은 여성들이 직장을 갖게 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노동에 참여하게 됐죠. 1인당 국민소득도 세계 5ㆍ6위 수준인데다 소득 불균형 정도는 상대적으로 낮아 국민들의 삶에 대한 만족도는 크게 높아졌습니다. 지난 25년 동안의 변화는 한마디로 성공적이었다고 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사회적 대화(social dialogue)로 인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구성원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견이 존재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공동의 의견을 모아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운데요. ▦우리 사회에도 많은 이견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대화와 협의를 중시하고 의견을 결정하는 데 있어 사회 파트너들의 견해나 참여를 허용하는 분위기가 있죠. 갈등은 있었지만 토론을 통해 해결해온 것입니다. 인구 1,600만명의 작은 나라가 ‘누가 무엇을 가질 것인가’를 놓고 다툰다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따라서 정부는 물론 노사 모두가 우리에게 도전이 무엇이고,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논의하고 결정할 수 있는 강점을 갖게 됐습니다. -교수님을 방문하기 전에 루버스 전 총리를 만나 리더십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사회적 합의에 이르기 위해서는 지도자들의 리더십이 중요한 것 같은데요. 리더십에 대한 교수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루버스의 역할은 중요했습니다. 루버스 전 총리 사례로 리더십을 얘기하자면 그는 국민들에게 ‘현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우리에게 가스 등 에너지가 있지만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주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병을 안겼다고 주장한 거죠. 그가 ‘경쟁력을 가진 나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측면에서는 마거릿 대처와 유사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대처와 다른 점도 갖고 있었는데, 그는 당시 노조 지도자였던 빔 콕과도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지속적으로 토론하면서 문제를 풀려고 노력했던 거죠. -한국의 노동시장 현안 중 심각한 것이 비정규직 문제입니다. 네덜란드는 고용창출의 해법으로 파트타임을 선택했는데 현재 상황은 어떤가요. ▦네덜란드의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모두 법에 의해 보호를 받습니다. 같은 수준의 건강보험 혜택을 받고 일정한 연금도 지급받죠. 물론 정규직에 비해 해고가 용이하기 때문에 문제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시간제 근로자가 모두 법의 보호를 받고 그들과 기업 간의 계약이 존중되고 또 사회적 복지 혜택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한국도 유럽의 법적 제도를 참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사회 대타협이 논의될 때 ‘재벌의 경영권을 보호해줘야 한다’는 것이 항상 쟁점이 됐습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한다고 보시나요.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네덜란드도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최근에 외국계 헤지펀드의 공격으로 ABN암로가 이리저리 쪼개져 해외로 팔려나갔습니다. 외국투자자의 공격으로부터 국민경제에 중요한 대기업을 보호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논란을 빚었는데 저는 당연히 보호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방법을 잘 써야 합니다. 외국인 투자 유입에 장해가 되지 않도록 하고 금융시장도 자유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너무 과도한 보호를 해서는 안되겠죠. 또 기업들은 M&A 논의가 있을 경우 노조에도 적극적으로 알려 모두의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수님이 쓰신 ‘네덜란드의 기적’이 사회 대타협을 추진했던 국가에서는 교과서처럼 읽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책을 낸 후 한국과 일본 등에서 많은 이들로부터 문의가 들어왔습니다. 물론 나라마다 역사와 환경이 다르니까 똑같이 모방할 수는 없겠죠. 다만 공동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과 이를 위해 적절한 제도적 장치를 갖추는 것, 또 중요한 결정에 있어 사회적 파트너들이 일정하게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 같은 노력이 있어야 경제 제도가 개선되고 혁신이 가능할 것입니다. 리더십이 중요하다고 해서 한국이 루버스나 빔 콕을 빌려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불확실성이 심화될수록 리더십은 더욱 중요해지게 마련이죠. -네덜란드의 사회 대타협이 유지되는 데 어려움은 없나요. 네덜란드 모델의 미래는 어떻게 전망하시나요. ▦사람들을 상호 통합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외국인 이민자들이 늘고 있지만 이들은 학교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비숙련 노동자여서 취업하기 대단히 어렵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복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사회 전반에 짐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경쟁력 있는 서비스 산업을 갖고 있고 상대적으로 젊은 층의 비중이 높습니다. 이들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훈련시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밝을 것입니다. ■ 피서르 교수는'네덜란드 기적모델' 전세계에 보급 주도 옐레 피서르 교수는 네덜란드의 저명한 사회학자로 '네덜란드 기적모델'을 전세계에 전파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각종 저술활동이나 강연 등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회 대타협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어 '대타협의 전도사'로 불릴 정도다. 피서르 교수는 최근에도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와 국제노동기구(ILO) 자문역으로 뛰면서 시대상황에 맞는 새로운 경제협력 모델을 제시하고 개발도상국가의 바람직한 노사관계를 제시해주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현재 암스테르담대 사회연구소와 독일의 막스플랑크 연구소 등에서 강의 및 공동 연구에 정성을 쏟고 있다. 피서르 교수가 안톤 헤이머레이크 에라스무스대학 교수와 공동으로 저술한 역저 '네덜란드의 기적'은 학계에서 사회 대타협의 영원한 고전으로 평가받을 만큼 명성을 갖고 있다. 피서르 교수는 이 책에서 "실제로 네덜란드에 기적이 있었는가"라는 자문을 던진 후 사회 대타협의 시대적 배경과 노사관계의 변화, 구체적인 합의과정을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피서르 교수에 따르면 이 변화의 '출발점'은 '합의'였다고 한다. 그는 "네덜란드의 사회 및 정치 부문에서 합의라는 단어는 매우 친숙하게 여겨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는 "'네덜란드의 기적'이 다른 국가들이 따라야 하는 모범사례는 아니다"라고 단정한 뒤 "(그 사회에 맞는) 적절한 제도적 장치를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충고한다. ■특별취재팀 정상범 차장(팀장)·이규진기자·박태준기자(산업부)·이철균기자(경제부)·권구찬 뉴욕특파원 arock@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