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에 대한 금융감독원의 검사와 제재조치가 「과거지향적」이고 희생양을 찾아내는 데 급급하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대출당시엔 별다른 문제가 없었는데도 해당기업이 부실해졌다고 IMF 이후 강화된 새 잣대를 가지고 담당자들을 징계하는가 하면, 별다른 권한이 없었던 실무자들만 애꿎은 희생양으로 삼아 여론을 무마하려 한다는 지적이다.이같은 검사방식은 금융산업의 선진화에 기여하기는 커녕 금융산업 종사자들의 「보신주의」만을 부추길 것이란 우려가 높다.
금감원은 지난 2월 산업은행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검사에 착수하면서 『한번 걸리면 절대로 봐주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놓아온 것이 사실. 마구잡이 대출로 경영부실화를 초래, 막대한 국민 혈세를 축낸 은행들의 잘잘못을 따지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처럼 별러 온 검사 결과는 당초 취지에서 벗어나는 모습이다. 혈세를 축냈다는 비판여론을 달래기 위한 「마녀사냥식 검사」로 이어졌다는 지적이다. 당시 상황은 무시한 채 「호통검사」로 일관, 멀쩡한 은행원들만 마녀로 몬 채 정작 책임자들에겐 면죄부를 주었다는 비난이 터져나오고 있다.
◇부관참시 문책=죄를 씌울 대상이 마땅치 않을 경우, 퇴직 임직원이 희생양이 됐다. 한빛은행에서는 최근 113명의 임직원이 문책을 당했는데 이 가운데 92명이 전직 임직원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점을 활용할 셈인데, 당사자들이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문책경고를 받은 한 전직 간부는 『퇴직당한 것도 울화가 치미는데 내가 직접 관할하지도 않은 업무상의 잘못을 모두 내게 떠넘겼다』며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대응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실적·형식주의=한빛은행에 앞서 검사를 받은 산업·기업·주택·하나은행의 경우, 공교롭게도 문책을 당한 임직원의 수가 서로 비슷한 현상(30~40명선)이 불거졌다. 이들 은행의 이익이나 부실 규모가 천양지차인데도 검사결과에 따른 문책은 매일반으로 나타난 셈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금감원이 마치 징계인원 목표를 설정해 놓고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 옛날 잘못을 캐내기에만 치중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잘못된 과거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지만, 지나친 과거집착은 오히려 은행 경영에 족쇄를 채울 수도 있다는 게 은행들의 불만이다.
한 시중은행장은 『은행들이 과거에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은행만의 단독범행이 아니며 사회구성원 모두가 공동정범』이라고 주장했다. 압력과 로비로 물든 관치금융의 소산이라는 것. 게다가 외환위기 이후 기업부도 도미노 현상이 벌어질 당시, 거래기업의 도산을 막기 위해 긴급자금을 빌려주었던 것까지 뒤늦게 문제삼는 것은 너무하다는 것이다.
◇강자엔 후하게 약자엔 박하게=금감원은 퇴출 금융사 임직원에 대한 책임추궁에는 추상같은 모습을 보여왔으나 대형 금융사는 솜방망이 징계로 매듭짓는 두 얼굴을 보이고 있다. 단군 이래 가장 가혹한 검사가 이뤄졌다지만 대형은행 임직원들의 불법이나 비리사실은 단 한건도 적발하지 못했다.
경기은행을 비롯한 퇴출은행의 경우 경영진이 줄줄이 검찰의 수사를 받고 구속됐다. 퇴출 종금사나 보험사 경영진도 예금보험공사로부터 손해배상 청구를 당해 평생 모은 재산까지 날릴 위기에 처했다. 반면 대형 금융사 전현직 임직원은 더 많은 국민혈세를 축내고도 별다른 불이익이 없는 「체면흠집」만 감수한 채 면죄부를 받았다.
◇국책은행은 일년내내 감사=국책은행은 이미 감사원의 감사가 이뤄진 마당에 금감원감사를 받아야 하는 탓에 1년의 절반을 감사 받아야 하는 처지. 한 임원은 『감사원 국회에 이어 금감원감사까지 받다 보니 수감이 본업이 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또한 국책은행의 특성을 무시하고 시중은행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문제다. 자금지원의 성격이 다른데 이를 무시한 채 결과만을 따진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한 여신담당자는 지난 90년 모중소기업에 대출을 시작, 100억원의 자금이 나가 있는 상태에서 4억원을 신규로 지원했다가 부도가 나자 감사에서 지적을 당했다. 이 담당자는 『주로 시설투자르 지원하기 때문에 최소 5년 이상의 장기대출이 나가는데 어떻게 일찍 회수있느냐』고 반문했다.
금감원은 이달과 다음달에 걸쳐 평화·외환·조흥·제일·서울은행 등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받아 회생한 시중은행들에 대한 검사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그러나 금융가에선 제대로 책임은 따지지 못하고 희생양만을 추려내는 금감원검사에 대해 더 이상의 기대는 하지 않는 분위기다.
한상복기자SBHAN@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