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서는 신속하고 독자적인 의사결정 메리트를 포기하면서까지 증시에서 자금조달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대규모 유통그룹 중에서 유일하게 비상장사로 남아 있는 이랜드 관계자는 기업공개(IPO)를 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연간 3,000억원 정도의 영업이익이 확보되는 상황에서 돈줄을 늘리기 위해 상장에 따르는 부담을 떠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기업들에 증시가 ‘자금통로’로서의 순기능보다는 ‘경영 부담’의 요인으로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의미로도 풀이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에 따라 “상장에 따른 비용, 주가 유지에 대한 압박, 도처에 도사리는 적대적 인수합병(M&A)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을 증시로 불러모으기 위해서는 그만한 ‘당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증시는 트로이의 목마(?)”=“기업들로서는 증시를 트로이의 목마처럼 경계와 기피 대상으로 볼 수밖에 없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재계의 목소리를 대변해 국내 증시를 이렇게 비유했다. 올 들어 KT&G의 경영기반을 뒤흔들고 1,500억원이라는 막대한 이익을 챙겨 간 칼 아이칸, 5%를 조금 웃도는 지분으로 태광그룹의 기업구조 바꾸기에 나선 ‘장하성펀드’ 등 주주의 이름으로 경영에 간섭하고 위협을 가하는 외부세력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인데다 주주들의 수익관리를 위한 배당과 자사주 매입에 드는 자금은 증시에서 조달하는 규모를 넘어선 지 오래다. 여기에 집단소송제에 휘말릴 리스크도 점차 커지고 있어 상장사가 입는 혜택보다는 감수해야 할 후유증과 부작용이 더 크다는 것이 재계의 목소리다. 한 대기업 고위관계자는 “국내 증시는 기업의 자금조달 창구라기보다는 기업의 자금을 퇴장시키는 소각로”라며 “미국처럼 직접금융시장을 통한 소유와 경영 분리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미국식 시스템을 도입해 국내 상장사들은 시장에서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자사주 매입 등 ‘벽 쌓기’에 자금을 쏟아붓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증시가 ‘위협’ 대상으로 인식되면서 참여하려는 기업도 줄어드는 추세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2002년부터 올 9월까지 코스피지수가 118.7% 상승하는 호조를 보였지만 상장기업 수는 6% 증가에 그쳤다. 국내 증시가 답습한 미국에서도 회계기준 강화로 상장비용이 늘고 집단소송 위험이 높아지자 기업들의 상장 기피현상이 부각, 이 기간 중 뉴욕증권거래소 상장기업은 오히려 4.6% 줄어들었다. ◇목줄 죄면 자진 상장철회 가능성도=물론 증시에 상장된 기업이 전혀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최도성 증권연구원장은 “지금은 기업들의 현금사정이 좋아서 증시를 통한 자금조달의 필요성을 못 느끼지만 상황이 바뀌면 상장사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며 “상장에 따른 부담이 따르지만 상장기업들은 공적인 신뢰와 투명한 정보전달 채널 확보 등의 메리트를 누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이 같은 혜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인 데 반해 기업들을 옥죄는 위협은 좀더 직접적으로 가해진다는 것이다. 최 원장도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상장사 지배주주들 중에는 경영권 보호를 위해 상장철회를 하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더욱이 내년부터는 중소 상장사의 부담이 더욱 가중될 전망이다. 기업지배구조펀드의 본격적인 활동과 함께 증권집단소송이 전면 도입됨에 따라 상장사의 법적 책임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배지헌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미국의 경우 상장사 부담을 가중시킨 2002년 ‘샤베인스-옥슬리법’ 제정 이후 자진 상장폐지 결의기업이 이전보다 50%가량 늘었다”며 “국내에서도 내년부터는 자진 상장폐지 기업이 속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상장사 부담 경감보다는 혜택 늘려야=재계에서는 미국식의 엄격한 상장사 규제와 무차별적인 펀드 자본주의를 지양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영주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펀드자본주의의 부정적 효과를 최소화하기 위해 펀드에 대한 규율을 강화하고 기업의 경영권 보호장치를 강화해야 한다”며 일본처럼 복수의결권주 발행을 허용하거나 우호주주 확보를 위해 제3자 신주배정 요건을 완화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대한상의도 주주이익과 경영안정성의 균형을 위해서는 ▦집중투표제 관련 대주주 의결권 제한 ▦자사주의 제3자 처분 금지방침 철회 ▦신주예약권 및 차등의결권 도입 등 외부세력의 공격 방어 부담을 경감시켜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담완화보다는 혜택을 늘리는 쪽으로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최 원장은 “상장 유지를 위해 M&A 시장을 얼어붙게 만들 수는 없다”며 “상장사에 대해서는 법인세율을 낮춰주거나 연구개발(R&D) 투자의 세액공제를 허용하는 등 상장 메리트를 높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배 연구원도 “투자자 보호와 시장기능 유지를 위한 규제는 필요한 사항인 만큼 부담완화보다는 세제상의 혜택을 주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