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 엘리트 코스·강한 자부심속 원칙·소신지켜온 '대쪽'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이미지는 '대쪽'이란 단어로 집약된다. '원칙론자','강직', '법치' 등 이 후보를 규정하는 키워드는 하나같이 곧고 차갑다. 이 같은 이 후보의 컬러는 다름 아닌 집안 내력에서 뿌리내린 것이다.
강직한 검사로 명성이 높았던 부친 이홍규(98)옹으로부터 생래적인 원칙주의는 물려받았다. 부친의 지도 아래 이 후보는 광주서중, 청주 중학을 거쳐 48년 경기중에 편입했다.
청주중학 시절 낮은 수학 성적 때문에 무작정 가출, 조치원 역까지 걸어갔다는 일화는 소년 시절 이 후보 성격의 일단을 살필 수 있는 대목이다.
경기중 시절은 이 후보를 엘리트 주의와 강한 자부심,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채색했다. 전형적인 수재 코스인 경기중ㆍ고를 거쳐 서울 법대에 입학한 이 후보는 4학년 때인 57년 고시 사법과 8회에 당당 합격, '대쪽 판사'로 대변되는 법조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암울했던 정치적 격변기인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기를 법복을 입고 헤쳐 왔다. 5ㆍ16 직후 혁명재판소 심판관으로 차출돼 근무했고 5공 정권 때는 최연소 대법관에 임용되기도 했다. 연이은 군사 정권 때 '소신' 판결로 원칙을 지켜 지금의 자리에 서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 단적인 사례가 서슬 퍼렇던 80년, 김대중 씨 집에서 불법집회를 가진 혐의로 구속기소된 박세경 변호사의 계엄법 위반 사건 상고심에서 '비상계엄 후에도 일반재판권을 제한한 계엄법은 명백한 위헌'이라는 소수의견을 낸 것. 당시로선 용기 있는 행동으로 평가됐다.
그는 결국 5공 정권의 눈 밖에나 재임용에서 탈락했지만 6공 출범과 함께 대법관으로 발탁된다.
그러나 그는 89년 동해ㆍ영등포을 보궐선거의 부정을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돌연 중앙선관위원장직을 사임, 세인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
이 사건으로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주목을 얻게 됐다. 이후 93년 2월 이 후보는 새 정부의 감사원장으로 기용돼 20여년 군사 기밀이란 보호막 속에 성역으로 남아 있던 율곡 사업에 사정의 칼날을 들이대 전직 국방 장관 등 6명의 고위 군 관계자를 법의 심판대에 세웠다. 그의 대중적 인기는 바로 이런 '대쪽'같은 카리스마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난 96년 신한국당 김영삼 총재의 권유로 입당, 우여곡절 끝에 신한국당 대선 후보로 서게 된다.
하지만 이인제 후보가 경선 결과에 불복, 대선에 출마함으로써 대통령을 향한 첫 도전은 김대중 후보에게 꺾여 물거품이 돼 버렸다.
그 당시 아들의 병역 문제로 홍역을 치렀던 이 후보는 지금 '빌라 게이트'파문을 수습하고 '엘리트 이미지'와 '귀족 이미지'를 불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얼마 전 당에서 이 후보의 중ㆍ고등 시절 생활기록부를 공개한 것도 이런 차원이다. 경기중 2학년 시절 성적이 전교생420명 중 305등이고, 중3 당시 수학과 과학 과목의 실력이 신통치 않았던 것으로 드러나 눈길을 끌었다.
이상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