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경영진 퇴진론」이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뒤흔들고 있다.전경련 부설 한국경제연구원(원장 좌승희·左承喜)이 지난 11일 연구보고서를 통해 재벌들의 사업·재무·경영지배구조 개혁을 촉구하면서 『실패한 경영진은 퇴진하라』고 한 대목이 일파만파를 일으키고 있다. 재벌을 기반으로 한 전경련과 한경연이 「포스트 재벌」을 거론한 것 자체가 파격이었다는 지적이다.
◇한경연의 보고서= 한경연은 지난달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 「대기업 환경변화와 대응과제」라는 주제의 연구가 진행중이라며 대체적인 윤곽을 보고했다. 구조조정이후 대기업들의 변화된 모습을 전망하고 나아갈 방향을 미리 그려보자는 취지였다는 설명이다.
左원장은 보고서에서 부채비율 200% 등 전경련 주도로 그동안 강력히 반발해온 정부의 각종 개혁조치들에 대해 『이제 현실로 인정하고 적극 활용하라』고 사고의 전환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경련 내부에서조차 『앞으로 재계의 입장을 강하게 밀고나갈 여지가 없어진다』며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한경연은 또 『총수에 의한 선단식 경영·차입경영으로 상징되던 재벌체제가 이제 존립기반마저 위협받고있다』고 규정, 논란을 예고했다. 옳은 얘기지만 전경련이나 한경연이 할 얘기는 아니라는 반발을 불러올 여지가 많았다.
◇전경련의 해명= 전경련 손병두(孫炳斗)부회장은 12일 『한경연 내부에서나 활용됐어야 할 자료가 공개됐다』며 『김우중(金宇中)회장은 물론 회장단에도 보고되지 않은 것으로 전경련의 공식입장이 아니다』고 밝혔다.
또 『한경연의 보고서 작성 목적은 기업들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모색하려는 것』이라며 『당초 취지와 달리 해석됐다』고 주장했다. 특히 실패경영진 퇴진론에 대해 孫부회장은 『전문경영인이 책임을 지고 구조조정을 하라는 얘기지 총수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이처럼 전경련이 서둘러 진화에 나선 것은 「실패경영진 퇴진」이 「총수 퇴진」으로 비화했기 때문. 일부 회원사들은 이날 아침 『우리 회비로 운영되는 기관이 이럴 수 있느냐』며 강력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경련으로서도 「재계가 정부에 항복했다」는 굴욕적인 해석이 나오자 무척 당혹했다.
◇전경련과의 교감이 없었다= 한경연이 전경련측과 충분한 교감을 갖지않은것은 분명해보인다.
左원장은 간담회에서 『보고서는 이미 김우중(金宇中)회장에게 보고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孫부회장은 『金회장은 언론에 보도자료가 배포되고 4시간 이상 흐른 뒤에야 자료를 받아봤다』며 『전경련 내부에서 한경연 보고서를 본 일도 없다』고 밝혔다. 내부 검토를 거쳤다면 이런 자료가 공개될 리 없다는 것이다.
◇사태 수습방향= 左원장과 한경연이 이미 큰 상처를 입었다. 대대적으로 보도된 보고서가 전경련에 의해 공식부인되는 상황은 한경연의 정체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있다.
左원장은 앞으로 한경연의 방향에 대해 『재계가 현실을 인정하고 변화에 앞장서자는 내용의 이런 보고서와 함께 재계의 주장에 충실한 대(對)정부 요구보고서도 함께 생산해낼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파문으로 인해 당분간 재계의 입맛에 맞지않는 소리를 담아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左원장 개인으로선 경위와 관계없이 「소신」이 부인되는 상황에 당혹해하고 있다. 보고서의 전반적인 내용과 무관하게 「총수퇴진」이라는, 재계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부분이 집중적으로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左원장의 입지가 크게 약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전경련 일부 관계자들은 「左원장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다」고 해석하고 있다. /손동영 기자 SONO@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