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장사를 업으로 하는 내 처지에서 ‘책을 읽자’는 독서 권장운동만큼 반가운 일은 없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책을 읽자’는 훌륭한 구호를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조언이나 참고 사항을 듣고 있으면 문득 ‘이거, 교양을 빙자한 지식인의 자기 과시에 입각한 강요 아닌가’ 하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는 주장만 해도 그렇다.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 이상이 한달에 책 한권도 안 읽는데 그래서는 안된다’는 게 요지인데 내 처지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과연 책이라는 게 그렇게 모든 사람이 꼭 읽어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인가.
왜 모든 사람이 책 읽어야 하나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책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뭔가를 알아야 한다거나 배워야 한다거나 즐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게 아니면 최소한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실험해보려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게다가 책은 몰두해서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면 되게끔 돼 있는 TV 시청이나 영화 관람과는 다르다. 책은 기호화된 텍스트만을 제공할 뿐이다. 독자들은 그 기호화된 텍스트를 두뇌 속에서 실물화시켜가면서 감상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독서라는 것은 상당한 지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시간을 때우기 위한 독서의 경우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렇게 지적인 행위에 몰두해 있을 필요가 있을까. TV 드라마나 비디오를 보면서 별다른 생각 없이 지내면 안되는 걸까.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느라 허덕거리고 어른들은 그 학원비를 대느라 헉헉거리는 작금의 상황에서 중간중간 생긴 잠시의 여가를 아무 생각 없이 보내는 게 그렇게 반성의 대상이 돼야 하는 걸까.
게다가 독서 권장운동에서 ‘책을 읽자’고 주장할 때의 책은 그냥 책이 아니다. 이른바 양서(良書)를 읽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양서라면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고는 한다. 도대체 양서가 무언지를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관련, 한 가지 참조할 만한 것이 이름도 거창한 어디어디에서 선정한 ‘권장도서목록’ 같은 것인데 그와 관련해서는 아예 쳐다보고 싶지도 않다. 가까운 이들에게 읽으라고 권할 마음은 더더욱 없고…. 도대체 철학과 출신인 나 같은 사람조차도 읽지 않은, 아니 앞으로도 읽고 싶지 않은,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선정에 참여한 사람들조차 대다수가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같은 철학 이론서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목록을 어떻게 신뢰하란 말인가.
그렇다면 내 경험을 반추해서 양서를 뽑아보면 어떨까. 그마저도 자신이 없다. 10대였던 과거의 나는 분명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경외감을 표현했었다. 그러나 40대인 지금의 나는 도대체 그 당시 내가 왜 그토록 감동했는지를 다소 의아해 하고 있다.
반면 김동인의 ‘감자’를 10대였던 나는 다소 에로틱한 소설로 읽었었고 40대인 나는 대단히 리얼리즘적인 작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 내가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양서를 골라낼 수 있을까.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아야 할 일이다.
독서는 개인적 지적행위일뿐
이도 저도 안된다면 좀 무지막지한 발상이기는 하지만 다수결에 따르면 어떨까. 물론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을 추리물의 고전이자 걸작으로 인정해야 하는데, 글쎄 나로서는 추리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런 의견에 과연 동의할지 의문이다. 오래됐으니 고전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수준은 범속한 추리물 중에서 나은 정도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어떤 분들이 정색을 하고 물을 것 같다. 도대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고.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독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지적 행위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교과 과정처럼 강요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정말이지 회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