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껍질을 벗었다. 금리차나 챙기는 「정형화」된 은행은 이제 살 수 없다. 벗겨진 허물 뒤에는 「새로운 은행상」을 이식(移植)시키기 위한 유형무형의 작업들이 살벌하리만치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은행의 증권화」는 바로 국내은행들이 미래의 금융대전에서 살아남기 위한 첫번째 도전이다.최근 은행권의 새로운 자금조달 수단으로 각광받는 ABS(자산유동화 증권)와 MBS(주택저당 채권)의 유동화. 김승동(金昇東) 주택은행 부행장은 이들 운용방법을 『은행이 「증권화」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했다. 은행이 자체 자산을 통해 스스로 유동성(돈의 흐름)을 창출해가는 은행의 미래형 생존전략이라는 해석이다.
「증권화」되고 있는 은행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지난 4월13일부터 판매되고 있는 단위형 금전신탁. 은행이 신탁계정의 극심한 자금이탈 속에서 마련한 이 상품은 미래은행 상품운용 방식의 단초가 됐다.
단위형 금전신탁 중 「안정성장형」과 「성장형」은 각각 수탁금의 10%와 30%까지를 주식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제한된 형태로나마 은행과 증권사의 벽을 허물었다. 몇몇 은행들은 단위형 신탁을 운용하기 위해 아예 증권사나 투신사에서 전문 펀드매니저까지 영입했다.
은행들은 아예 증권사와 표면적으로 손을 잡는다. 무한경쟁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전략적 제휴」의 길을 택한 것이다. 배타적인 경쟁보다는 공생(共生)에서 살길을 찾겠다는 의도다.
올초 뮤추얼펀드가 각광받을 때부터 몇몇 은행들은 은행 창구에서 펀드판매를 대행하는 형식으로 한발 앞선 제휴를 통해 증권업무에 발을 들여놓았다. 외환·주택·신한·한미은행 등이 은행점포망을 이용해 펀드 상품을 팔아주는 대신 수수료 수입을 올렸다. 그러나 최근에 나타나는 은행·증권사간 전략적 제휴는 이같은 초보적인 형태의 업무제휴보다 진일보한 단계에서 진행되고 있다.
「국가 프로젝트」라는 한빛은행. 지난달 말 이 은행은 삼성증권과 사이버증권 업무제휴를 전격 체결했다. 고객이 증권사 객장에 가지 않고도 은행 통장으로 증권거래를 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단기적 목적은 증시 고객을 동시에 은행으로 유치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 2일에는 한국투자신탁과도 복합상품 개발·판매와 수탁업무 등 각 부문에서 협력한다는 내용의 전략적 제휴를 맺어 「증권화」의 막을 열었다.
한빛은행은 이같은 제휴를 발판으로 하반기께는 투자은행 부문을 집중 육성하겠다는 방침이다. 이수길(李洙吉) 한빛은행 부행장은 『이제 막 발을 디딘 단계』라며 『지금까지는 머니 마켓(MONEY MARKET)에만 머물러 왔지만 앞으로는 투자은행으로서 자본시장(CAPITAL MARKET)에 참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거대한 자본시장에서의 영업에 뛰어들지 않고는 국내외 금융기관들간의 무한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李부행장은 『나중에는 사업본부 가운데 자본시장 본부가 분사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그만큼 자본시장 관련 업무비중을 높이겠다는 얘기다.
증권사와의 사이버증권 업무제휴는 은행들 사이에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몇몇 은행들은 자회사인 증권사를 대상으로 구체적인 검토작업을 시작했다. 외환은행은 환은살로먼스미스바니 증권 고객의 위탁계좌 개설을 은행이 대행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으며 신한은행도 신한증권과 업무제휴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나은행 역시 하반기부터 하나증권(옛 보람증권)과의 제휴형태로 은행 창구에서 증권업무를 취급하는 방안을 오래 전부터 검토해오고 있다.
우의제(禹義濟) 외환은행 상무는 『은행과 증권의 업무제휴 중 대표적인 예가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고 별도의 증권회사 없이 인터넷망을 통해 거래에 참여하는 사이버증권』이라고 설명했다. 禹상무는 『1차적으로는 상품·판매제휴에 머물겠지만 자본제휴로까지 발전하면 은행과 증권사간의 합병도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국내은행이 세계적인 조류를 거스르지 않는 한 은행의 증권화는 앞으로 더 빠르고 심도있게 진행될 전망이다. 장기적으로 감독당국의 은행업무 규정이 개방형으로 바뀌면 은행은 증권부문에 좀더 깊게 발을 담글 수 있다.
이같은 증권화 현상은 국내은행들이 미국계 투자은행이나 유럽계 유니버설 뱅크(종합 금융그룹)로 변모하는 전초단계로 해석된다. 몇몇 은행들은 올들어 기업의 M&A 중개나 자산관리 등의 기능을 대폭 강화, 투자은행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려 하고 있다.
한빛은행 李부행장은 『사이버뱅킹을 주축으로 한 은행의 변화 속에서 1~2년 내에 은행과 증권간의 벽은 허물어질 것』이라며 『업무영역 파괴는 은행·보험보다 은행·증권간에 더 빨리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제 막 시작된 「은행의 증권화」라는 진동은 「유니버설 뱅크 출현」이라는 대규모 지각변동을 희미하게 예고하고 있다. /금융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