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금융계 언론담당 인사들은 "올해 말이 오기 전에 (다른 부서로) 떠나야 할 텐데…"라고 말하고는 한다.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 선거 이후 몰아닥칠 최고경영자(CEO)에 대한 인사광풍이 두렵다는 것이다. 10년 가까이 언론홍보를 해온 금융계의 한 인사는 "지난 대선이 끝나고도 CEO 인사 교체바람이 거셌다"면서 "CEO 인사 교체 때부터 불거진 잡음은 여타 임원 인사에까지 영향을 줬고 그 부작용은 수개월을 갔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금융회사 언론담당도 "대선 이후 교체될 금융지주회장 이름이 벌써부터 거론되고 있는데 연말부터 내년 초까지 얼마나 시끄럽겠느냐"고 말했다. 권력교체에 따른 금융계 CEO리스크가 대선이 5개월가량 남았음에도 금융계를 달구고 있는 셈이다.
◇정치금융에 휘둘린 인사…벌써부터 줄대기 만연=사석에서 만난 금융계 임원들은 대통령 선거의 향배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여당이나 야당의 유력 후보 대선캠프에 누가 포함돼 있는 지에서부터 실제 대선 결과는 어떻게 될지 등에 대한 정보와 예측은 정치 전문가를 뺨칠 정도다.
민간회사인 금융계의 이 같은 관심은 정부부처를 연상하게 한다. 고위급 승진의 키를 청와대가 쥐고 있는 탓에 관료들은 대선의 결과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선캠프, 그리고 대통령 선거 이후 꾸려질 인수위원회 구성까지 소상히 파악한다. 각종 인적 네트워크를 이용, 선도 댄다. 인수위 파견이 고속승진의 직행 티켓이 되고 또 대선 이후 판이 만들어지는 정부조직 개편에 최대한 유리한 토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부처의 한 고위 관계자는 "관료들이 대선결과, 그리고 그 주변의 인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하지만 금융회사 임원들이 대선에 과도하게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한국금융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아니냐"고 씁쓸해 했다.
정치금융이 금융계 CEO의 인사에도 깊숙이 간여하면서 대선 때만 되면 으레 현직은 물론 전직의 금융계 인사들이 실세들에게 선을 대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지주의 한 고위 관계자도 "'누가 어느 캠프 쪽 사람과 가깝다더라'에서부터 캠프에 합류했다는 소식까지 많은 이야기가 들려온다"면서 "대선 이후 이들이 어떤 자리를 노릴지는 뻔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실제로 일부 인사는 벌써 박근혜 새누리당 전 대표 라인에 줄을 섰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 관계자는 "금융이 자꾸 본업을 떠나 5년마다 CEO 인사를 두고 홍역을 앓고 있는 모습이 금융인으로서 너무 안타깝다"고 하소연했다.
◇경쟁력은 높아지는 한국금융, 족쇄는 정치금융=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내로라하는 글로벌 금융그룹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고 살아 남은 곳은 투기등급까지 신용등급이 추락하는 속에서도 한국의 금융회사들은 신용등급이 도리어 상향조정됐다. 올해부터는 발행하는 글로벌본드마다 투자자들이 몰리면서 좋은 조건에 자금도 조달하고 있다. 비록 세계 1,000대 은행에 포함된 우리나라 은행 수가 일본(103개), 중국(101)개, 인도(32개) 등에 한참 뒤진 9개에 불과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10여년 만에 한국 금융산업의 내실은 확연히 탄탄해졌다는 게 금융계 안팎의 평가다.
하지만 추가 성장은 한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정치권에 휘둘려 5년 혹은 수시로 되풀이되는 CEO리스크를 가장 큰 원인으로 꼽는다.
금융지주의 한 고위 임원은 "글로벌 기업설명회(IR)를 갔는데 주된 질문 중에 하나가 '선거 이후 CEO가 또 바뀌는 것 아니냐'였다"면서 "정치권에 휘둘린 잦은 CEO 교체를 외국인투자가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여실히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금융지주의 CEO로서 업무를 파악하고 전략을 짜는 데 못해도 1년은 걸린다"면서 "솔직히 업무를 파악하고 일을 좀 할 만하면 바뀌는 게 현실 아니냐"고 지적했다.
◇임기보장ㆍ인사추천위원회 독립 등 절실=정치금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CEO의 임기보장 등이 돼야 한다고 금융계 안팎에서는 지적한다.
그에 앞서 회장이나 은행장 등 인사추천위원회의 독립도 절실하다. 독립된 인사추천위원회에서 전문성 등을 갖춘 최적의 CEO를 뽑고 그 뒤 선출된 CEO는 임기를 보장해야 CEO리스크가 최소화된다는 것이다. A시중은행장은 "임기가 보장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추진하는 일의 경중은 물론 성격도 달라진다"면서 "한국은행 총재의 임기를 보장하는 것도 책임을 갖고 통화정책을 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 아니겠냐"고 말했다.
이와 함께 도입된 지 10년이 넘은 금융지주회사 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손질도 필요성도 강조한다. 25일 만난 4대 금융지주에서 30년 넘게 일해온 한 CEO는 "금융사들의 지배구조 문제는 사실 고용된 CEO임에도 스스로가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면서 생긴 부분이 크다"고 고백했다.
'은행-보험-증권-자산운용' 등을 총괄해 계열회사 간의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성장전략을 마련하기 위해 금융지주회사 체제가 만들어졌지만 실상은 회장의 권한만 커졌다는 지적이 많다. 일각에서는 "지주 회장은 권한은 커졌는데 책임은 적어지는 형국이 됐다"고도 한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치권이 측근을 지주회장 자리에 앉히려 한다는 것이다. 금융감독 당국의 한 고위 관계자가 "지주회장의 역할 정립은 반드시 필요한 부문"이라면서 "오랫동안 CEO에 머물면서 발생하는 이른바 '대리인'의 문제가 너무 커졌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