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아남그룹/“신의·인화” 중시 인본주의경영(재벌)

◎70연대 오일쇼크때도 감원없이 위기극복/“로비로 크면 망한다” 기술·인재로 승부/내년 창업 30돌… 공격적 사업다각화·해외투자로 제2도약서울 성동구 화양동 아남그룹빌딩 7층에 있는 우곡 김향수 명예회장실에 들어서면 「신의」라는 휘호가 눈길을 끈다. 전남 강진에서 한학을 배우며 자란 김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한 말이다. 아남그룹의 계열사에는 어김없이 김명예회장의 경영관을 담은 친필휘호가 곳곳에 걸려있다. 우곡은 「인화」도 특별히 강조한다. 재미있는 것은 인화의 인자가 사람인이 아니라 참을 인자 라는 점이다. 「참으면서 화목하자」는 뜻이다. 내년으로 창업 30주년을 맞는 아남은 「사람과 신의」을 중시하는 동양적인 철학에 성장의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아남은 지금까지 인위적으로 감원을 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인간존중의 경영을 이념으로 삼고 있는 우곡은 훌륭한 기술자가 되기 이전에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을 기회있을 때마다 강조한다. 불황에 따른 경비절감을 위해 많은 기업들이 명예퇴직이다 대기발령 등을 통해 사람을 줄이고 있으나 아남은 중대한 해사행위를 하지 않는한 퇴사라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이런 인간존중의 경영은 아남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재기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70년대 두 번의 오일쇼크로 전세계가 불황의 회오리에 휘말렸을 때도 아남사원들은 『언젠가는 호황이 올 것이다』는 확신을 갖고 불황의 고통을 서로 나누었다. 72년 대홍수 때의 일이다. 당시 화양동 공장은 1미터 가량 물에 잠겼다. 아남 사원들은 일요일밤을 꼬박 세우며 생산라인의 기계와 자재를 2층으로 옮기고, 월요일 아침부터 정상가동시켜 고객들에게 약속한 납기를 지켰다. 기적에 가까운 아남의 신의정신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74년말 부터 75년까지 제1차 오일쇼크로 세계적인 불황이 몰아쳤을 때 4천3백여명의 아남 직원들은 일감이 없어 절반이 회사문을 나가야할 정도로 심각한 경영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우곡은 경기가 회복될 때까지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 참고 이겨 내자며 그 무서운 불황에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인위적인 감원없이 전사원이 함께 일할 수 있게 됐습니다.』 김규현 아남그룹 기획조정실장의 말이다. 아남은 정도를 생명처럼 지킨다. 정도경영은 구호가 아니다. 김주진 회장은 『로비로 기업을 키우게되면 언젠가는 풍랑을 맞게 된다. 또 로비란 사람이 바뀔 때마다 해야하는데 그 비용을 어떻게 충당할수 있는가. 그런 기업은 반드시 언젠가는 심한 어려움을 겪게된다. 아남이 로비할 줄도 몰랐지만 로비로 기업을 키워왔다면 지금은 흔적이 없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고 말한다. 창업주의 근검절약정신과 김회장의 이같은 의지는 정경유착과 무관한 그룹으로 남게 됐다. 아남은 지금까지 정치권의 싸움에 한 번도 휘말린 적이 없다. 우곡은 고 박정희 대통령과도 친분이 돈독했으나 한 번도 개인적인 부탁을 하지 않을 정도로 정도경영의 원칙을 지켰다. 우곡은 『기업가는 사회의 공기로서 자기의 욕구충족만을 위해 몰지각한 행동을 함으로써 사회의 지탄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회있을 때 마다 강조한다. 기술개발과 제조업이 발전되지 않는 경제는 사상누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아남의 경영진들은 인재육성, 우수인력의 확보에 주력한다. 그렇다고 스카웃과 같은 손쉬운 방법은 절대로 쓰지 않는다. 아남은 기술자집안이면서 박사집안이다. 흔히 기술자들이 그렇지만 오직 기술로만 승부하지 요령을 피우지 않는다. 김회장은 미국 펜실베이니대학 경제학박사로 10년간 경제학교수를 한 사람이다. 둘째인 김주채 부회장은 매사추세츠공과대학 출신의 공학박사로 듀퐁사 선임연구원을 지내다 지난 74년 아남 기술고문으로 영입돼 자동화를 통한 공정개선에 주력해온 사람이다. 김주천 부회장은 아버지의 종용으로 웨이퍼핵심기술을 배우기 위해 71년 미국웨이퍼공장에 취직해 톰슨사 웨이퍼기술담당을 지내다 86년 귀국해 공장책임을 맡고 있다. 모두가 학자출신이다 보니 원리원칙에 너무 충실하다. 한우물을 파고, 우직할 정도로 요령이 없다. 아남은 사람과 믿음을 중시하는 기업문화를 갖고 황소처럼 우직하게 반도체외길만을 걸어왔다. 요령이나 잔꾀를 부리지 않았다. 그러나 국경없는 무한경쟁시대가 전개되고 효율성이 경쟁력의 잣대가 됨에 따라 아남은 지금 새로운 도전과 시련을 맞고 있기도 하다. 종전에는 인간존중의 가족주의 기업풍토가 사람들 사이에 인화와 친목을 돈독히 함으로써 불황극복의 토대가 됐지만 이제는 걸림돌이 될수도 있다는 얘기다. 아남사람들도 이를 인정한다. 다른 기업에 비해 역동성이 매우 떨어진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아남은 이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창업 30돌을 맞는 내년을 제2창업의 전기로 삼는다는 각오다. 창업 이후 29년동안 써 온 로고도 바꾸고 심볼도 바꿀 생각이다. 이같은 아남의 변신을 위한 노력은 92년 김주진 회장 취임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아남은 지난해 전국TRS(주파수공용통신·Trunked Radio System) 사업권자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반도체 외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지난해 한미아남할부금융의 사업개시, 미 솔로몬브라더스사와의 합작증권사설립 등 금융부문을 보강하고 있으며, TRS사업권획득, 반도체일관생산체제 구축 등으로 반도체·전자주력에서 금융·환경·정보통신 등으로 다각화를 추진하고 있다. 아남은 이같은 사업확장으로 종합적인 그룹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고 보고 올해부터는 신규진출한 사업의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 앞으로 5년안에 재계 랭킹 10대권으로 진입한다는 계획이다. 아남은 우물안 경영에서도 벗어나고 있다. 국제화시대를 맞아 글로벌기업환경을 구축하기 위한 해외투자에도 적극 나서고 있는 것. 필리핀 마닐라에 2개의 공장을 비롯 라구나 지역의 첨단산업공단에 3만5천여평의 부지에 약 2억달러를 투자해 제3공장건설을 서둘러 오는 4월중에 가동에 들어갈 계획이다. 아남은 고부가가치 패키징기술을 필리핀에 전수하고 있으며, 올해안에 수빅만인근에 1개의 공장을 더 짓는 문제도 검토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전문잡지인 포브스지는 지난 94년 12월19일자로 아남에 관한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에서 아남은 「고래틈에 낀 새우 한 마리」로 묘사됐다. 세계유수의 반도체 회사들의 틈새에 끼여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남은 이제 결코 새우가 아니다. 아남은 작년 세계유수의 반도체회사인 미 TI와 손잡고 그룹의 매출규모를 뛰어넘는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며 비메모리 반도체 일관공정사업에 진출했다. 오는 98년부터는 본격적인 생산에 나선다. 생산도 하기 전에 이미 납품선이 기다리고 있다. 「고래 틈에 낀 새우 한 마리」는 이제 새우가 아니며, 당시 새우라고 부르던 고래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아남이 고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날도 그리 멀지 않은 것이다.<김희중> ◎“근검절약은 곧 기업경쟁력”/창업자 김회장 10년된 구두신고 접대비·경비절감 제품원가 낮춰/직원들 복지문제엔 과감한 지원 아남은 창업주를 비롯해 모든 종업원들의 근검절약 정신이 유난히 강하다. 중견 재벌그룹으로 성장한 아남 창업자인 우곡은 요즘도 10여년 전에 산 갈색구두를 신고 다닌다. 양복도 언제 샀는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주위사람들이 『그만큼 돈 벌었으면 좀 쓰고 살아도 되는 것 아니냐』고 핀잔을 주면 『나는 이 구두와 양복이 편하다』면서 고집을 꺾지 않는다. 티슈도 절반으로 쪼개 쓰고 배달되는 신문에 끼여들어오는 광고 전단지도 메모지로 활용할 정도로 근검절약정신이 몸에 배어 있다. 그렇다고 모든 씀씀이에서 인색하다는 것은 아니다. 직원들의 복지문제라면 팔을 걷어부치고 나선다. 비용을 아끼더라도 꼭 쓸 때는 과감히 쓴다는 얘기다. 2세들도 아버지의 근검정신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김주진 회장은 기회있을때마다 과분한 접대를 하거나 받지 말도록 주지시킨다. 그래서 아남은 다른 기업들보다 원가경쟁력이 높다. 돈을 쓸데없는 곳에 유흥하지 말고 그 비용을 제품값을 깎아주는데 쓰도록 하고 있다. 요즘 경기도 부천에 비메모리 반도체공장을 짓기 위해 장비를 도입하고 있는 아남산업 황인길 사장은 장비업체들로부터 『해도 너무 한다』는 말을 듣는다. 비싼 접대로 유혹하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그 자리를 피한다. 동양에서는 대개 상담은 술자리에서 이뤄지는게 보통이지만 아남만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서양인들에게는 더욱 통하지 않는다. 김이환 그룹홍보담당 전무는 『흥청망청하는 접대문화를 근절해 아남은 다른 경쟁업체에 비해 20∼30% 정도의 경비를 절감할 수 있었고 그만큼 경쟁력을 강화하는 밑거름이 되어왔다』고 강조한다. 근검절약이 단순한 생활습관이 아니라 기업경영에서 경쟁력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불황돌파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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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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